콜린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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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는 [[프라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세를 몰아 [[프라하]]를 포위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다운 원수는 행군이 늦는 바람에 프라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패잔병 16,000명을 부대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다운 원수는 이들과 함께 프라하를 구원하기위해 서서히 진군하기 시작했고, 프로이센군은 이로 인해 프라하를 공략할 부대와 다운 원수와 교전을 벌일 부대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다운 원수를 견제하기위해 323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였다.{{sfn|Clodfelter|2017|p=187}}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이 장기간 동안 프라하를 공략함과 동시에 다운 원수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을 견제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아니면 프라하 수비군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군과 싸울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콜린 (체코)|콜린]] 근처의 언덕에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44,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자료에 따르면 65,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장은 완만한 능선이 계속되는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세운 계획은 자신의 전군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군 좌익에 병력을 집중시켰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의 전열에 따라 대치하고 있는 프로이센군의 우익과 중군에 어느 정도 병력을 배치해야만 했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은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을 공격하기 위해 우익으로 전환하였다. 프로이센군의 좌익은 그들이 맞선 오스트리아군과 비교해 수적인 우위를 취하게 되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이 격파당한다면 전투는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