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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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은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약120,000여명에 이르렸고 동상으로인해 손가락과 발가락 뿐만아니라 손과발까지 절단난 200,000여명이 넘는 동상자들을 이르게한 사건을 말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이승만]]은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서 활약했던 [[김두한]]을 국민방위군 육군준장 사령관으로 임명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김두한]]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대경험이 없다고 해서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했다. [[신성모]]는 최초에 [[대동청년단]] 단장 [[김윤근 (국민방위군)|김윤근]]을 육군 준장에 추천하여 임명한 뒤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부사령관에는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 대령으로 특별 임명된 뒤 보직되었다.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도아니고 군대 경험이 없는자들이였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1951년]] 봄이 돼서야 이 사건이 국회(당시 부산)에서 폭로되어 드러남으로써,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 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 (1868년)|이시영]](李始榮)은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또한 야당 내에서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한민당]]과 [[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계 인사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군입대 기피현상 증가 및 [[이승만]] 내각의 신뢰도는 급격히 실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