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한비자4 (토론 | 기여)
조종화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7번째 줄:
고려의 왕이 몽고군에게 보낸 사자(使者) 김기성 일행과 선물을 보룡역에서 약탈하였으나, 동진국(東眞國)의 군사와 함께 [[춘천시|춘주]](春州)의 천곡촌(泉谷村)에서 머물다 신의군(神義軍)의 군사들에게 다시 빼앗겼다.<ref name="Jo_hui_YeolJeon" /> [[양양군|양주]](襄州)에서 난민들이 요청하자 군사 400을 내어주어 양주 수령 지주사(知州事)를 잡아가게 하기도 했다.<ref name="Jo_hui_YeolJeon" />
 
조휘가 몽고에 투항한 이후 증손종증손 [[조소생]]이 [[1356년]]에 [[유인우]]를 비롯한 고려군에게 쫓겨날 때까지, 4대 99년 동안 쌍성총관부는 조휘 집안의 후손이 세습하고, 천호 자리도 탁청의 후손들이 세습했다.<BR />
조휘의 손녀딸이 [[조선 태조|이성계]]의 할아버지 [[조선 도조|이춘]]에게 시집을 가기도 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aa_000015&grp=&aid=&sid=0&pos=6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15번째기사] 娶趙氏, 雙城摠管之女</ref><B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