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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1923년 11월 9일 실패한 [[뮌헨 폭동]]의 실패점을 배우고, 히틀러의 변호사이자 조언가인 [[한스 프랑크]]는 형식적, 그리고 공공연히 법률을 따르면서 국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국가 혁명"으로 가기 위해 Legalitätsstrategie(적법성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한다. [[1930년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가 큰 지지율을 받은 이후, 총리인 [[독일 중앙당]]의 [[하인리히 뷔링]]은 [[바이마르 헌법 48조]]를 통한 긴급 법령으로 [[독일 사회민주당]]가 지지하는 소수 정부를 통해 독일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나치의 돌격대와 [[친위대]]를 금지시켰지만, 곧 대통령 힌덴부르크와 국방장관 [[쿠르트 폰 슐라이허]] 주위에서 우익의 압력으로 1932년 금지 명령을 취소해야 했다.
 
경제적 관점으로, 뷔링은 엄격한 공공 예산 균형 정책으로 인한 대규모 실업자를 만들어냈다. 1932년 6월 1일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의 압박으로 총리에 자신의 인기를 등에 업고 나치와 협력할려는 우익인 [[프란츠 폰 파펜]]을 임명시켰다. [[독일 중앙당]], [[독일 국가인민당|국가인민당]], 나치와의 연합정부는 히틀러의 총리직 요구로 인해 무산되었다. 파펜이 나치와 협력한 이후, 1931년 [[베르너 베스트]]가 쓴 Boxheimer Dokument를 [[헤센 주 경찰]]이 유출시키고 나치의 또 다른 쿠데타 계획이 들통나 미리 대책을 세웠지만 나치당을 금지시키진 않았다. 대신, 파펜과 힌덴부르크는 [[프로이센 자유주|프로이센 자유 운동]]의 쿠데타인 [[프레우엔슈레그프로이센슐라그]](Preußenschlag)를 사주하여 [[제국의회]]의 부통령인 [[오토 브라운]]을 해임시켰다.
 
[[1932년 7월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제국의회 (바이마르 공화국)|제국의회]]의 최대 다수석을 차지했다. 파펜의 [[연합 정부]] 구성 시도가 실패한 이후, 총선거가 다시 개최되어 [[1932년 11월 독일 총선거]]에서 파펜의 과반수를 넘을려는 기회 없이 지지율을 약간 잃었다. 마침내, 파펜은 사임하고 산업부, 재정부, 농업부 등 12개 부의 장관 등을 나치당 인사로 채우는 [[인드스트리엘레네인가베]](Industrielleneingabe)에 서명하고, 힌덴부르크는 12월 2일 슈나이더의 청원으로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우익 나치와 [[독일 국가인민당]](DNVP)의 반민주적 [[제3의 위치]] 및 [[셸헬름, 번드 데르 프론트솔데텐]](Stahlhelm, Bund der Frontsoldaten)과 같은 국가사회주의적 압력 단체와 함께 지지를 받으려 시도했고, [[1929년 독일 국민투표]]와 1931년 [[합스부르크 전선]] 등 공공 노력을 이끌려고 했다. 그러나, 슈트라서의 계획은 실패했고 1933년 1월 4일 히틀러는 파펜을 만나 파펜을 [[히틀러 내각]]의 부총리로 임명했다. 국무장관인 [[오토 마이스너]]와 힌덴부르크의 아들인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과 함께 파펜은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라고 설득시켰다. 파펜과 독일 국가인민당 당수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만약 총리가 필요한 경우 히틀러 내각에는 [[헤르만 괴링]]과 [[빌헬름 프리크]] 등 나치당에 두 장관만 있기 때문에 해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