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 (88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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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馮道, [[882년]]<ref name=HFD126>《[[구오대사]]》, [[:zh:s:舊五代史/卷126|권126]].</ref> ~ [[954년]] [[5월 21일]]<ref name=HFD126/><ref name=AS>[http://sinocal.sinica.edu.tw/ 대만 중앙연구원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ref>)는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 시대]]에 걸쳐 활약했던 [[중국]]의 정치가이자 고급 관료이다. 그는 오대의 [[후량 (오대)|후량]] 이후 4왕조 중 3왕조([[후당]]・[[후진 (오대)|후진]]・[[후주]])에 걸쳐 [[재상]]을 지냈고, [[후한 (오대)|후한]] 때는 재상을 역임하지 않았으나 당시의 정부 요인이기도 하였다. 사후 '''영왕'''(瀛王)에 추증되었으며, '''문의왕'''(文懿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자 (이름)|자]]는 '''가도'''(可道).
 
군벌 정권의 혼란 시대에 [[후당]]·[[후진 (오대)|후진]]·[[요나라|요]](遼:契丹)·[[후한 (오대)|후한]]·[[후주]]의 5왕조 11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항상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절조·파렴치한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난세에 처하여 민중 생활의 안정을 잘 보살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관후한 어른이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또 [[경서]](經書) 인쇄로는 최초로 『구경(九經)』의 간행 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은 문화사상의 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