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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李承休, [[1224년]] ~ [[1300년]] [[11월 13일]]([[음력 10월 2일]]))는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利縣)<ref>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이다.</ref> 사람으로 가리 이씨(加利 李氏)의 시조이다.<ref name="글로벌 문학">{{글로벌세계대백과2|저자=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고려시대 문학-이승휴}}</ref>
== 생애 ==
9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세에 신서(申諝) 밑에서 《[[춘추좌씨전]]》과 《[[역경|주역]](周易)》 을 익혔다. 14세에 아버지 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 밑에서 양육되었다.<ref>『동안거사문집』 권1, 병과시(病課詩) 서문</ref> 그 후 몽고 침입으로 고려 정부가 천도(遷都)한 강화도로 들어가서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우 관계를 맺게 된다. 29세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환도하지 못하고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했다. 원나라에서 올린 그의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다. 동행했던 송송례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ref>『동안거사문집』 권4, 빈왕록 서문</ref> 귀국 후 벼슬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다. 하지만 탐관오리 7명의 죄상을 밝혀 가산을 몰수한 일로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안거사(動安居士)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ref name=a>『고려사』 권106, 「열전」19, 이승휴 </ref> 충렬왕 6년(1280년)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된 이승휴는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ref>『[[고려사]]』 권29, 「세가」29 , 충렬왕 6년(1280) 3월 14일(을묘)</ref><ref name=b>『고려사』 권106, 「열전」19, 심양</ref> 이 사건을 역사서에서는 "이 때부터 언로가 막혀버렸다."라고 평가했다.<ref name=b /> 그 후 한동안 벼슬을 떠나 용안당(容安堂) <ref> 용안당은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 아래의 천은사(天恩寺)에 있다.</ref>에서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다.<ref name=a /> 1300년(충렬왕 26년) 10월 2일(양력 11월 13일)에 77세를 일기로 고단한 생을 마쳤다.<ref name=a /><ref>『[[고려사]]』 권31, 「세가」31, 충렬왕 26년(1300) 10월 2일(계유)</ref>그는 일생을 정치와 문학으로 일관했으며, 종교적 소양도 풍부하였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2|저자=인명 사전-이승휴}}</ref>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