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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막내아들 [[원상 (후한)|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 (후한)|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은 미소년이었던 [[원상 (후한)|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 (후한)|원상]]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원상 (후한)|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켰으며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다. [[저수 (후한)|저수]](沮授)는 이에 대해 간언하지만 원소는 오히려 "다른 자식들도 각 주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며 무시했다.
 
이때 원소는 [[원상 (후한)|원상]]이 장성하여 후계자로서의 경력과 권위를 인정받기 이전에 자신이 죽음으로써 후계문제에 혼선이 생길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소가 병으로 급사함에걱정 속에 사망(憂死)함에 따라 나이가 어렸던 [[원상 (후한)|원상]]은 그 지지기반이 극히 취약한 상태에서 집권하게 되었으며, [[원담]] 또한 청주의 도독으로서 독단적인 행동이 가능한 위치였으므로 이는 원씨 일족이 내분에 빠져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이 무렵부터 원소는 정권의 2인자였던 [[저수 (후한)|저수]]와 별가(別駕) [[전풍]]을 대표로 한 기주의 호족·명사 계층과의 대립이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원소의 영지 내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 후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현들을 모두 공격해 평정하였다(201년 4월).
 
비록 관도에서 패하긴 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조조]]를 웃돌고 있었다. 하지만 원소는 관도에서 패배한 이후 병을 얻었고, 건안 7년([[202년|202]]) 5월 경술일(庚戌日)에 피를걱정 토하며속에 죽었다.<ref>《후한서삼국지(後漢書三國志)》 효헌제기원소전(孝獻帝紀袁紹傳)</ref> : 自軍敗後發病, 七年, 憂死.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 : 紹自軍破後, 發病歐血, 夏五月死.
 
《후한서(後漢書)》 원소전(袁紹傳) : 自軍敗後發病, 七年夏, 薨.
 
《후한서(後漢書)》 원소전(袁紹傳) 주석 魏志曰:「紹自軍破後, 發病歐血死.」
 
《후한서(後漢書)》 효헌제기(孝獻帝紀) : 七年 夏 五月 庚戌 袁紹薨.</ref>
 
원소는 사람됨이 관아하였으며 올곧고 바른 정치를 펼쳐 존경을 받았고, 그에게 불만을 내는 목소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소가 죽자 지체높은 사대부에서 시골의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하북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 죽음을 비통해하여 온 거리와 저자에 통곡이 끊이지 않았고, 간혹 원소의 죽음을 두고 부모가 죽은 것처럼 상을 치르는 자도 있었다.<ref>《헌제춘추(獻帝春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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