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abargo (토론 | 기여)
Cabargo (토론 | 기여)
64번째 줄:
 
=== 사후 ===
배소 근처에 임시 매장하였다가 고향 소촌리 마을 뒷산으로 이장했는데 [[안성군]] 유림들의 반대로, [[1688년]](숙종 14년) [[2월]] 시신을 옮겨 [[경기도]] [[안성군]] 소만리에 장사하였고<ref>신도비에 그의 묘의 위치를 집 뒤라고 기록하고 있다.</ref>, 뒤에 [[안성군]] [[안성읍]] 봉남동(鳳南洞) 마곡(馬谷)으로 이장하였다.

사후 문간(文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1689년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복작(復爵)되고, [[1690년]](숙종 16년) [[9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92년]] [[안성군]] 유림들의 공의로 [[안성]] [[소촌면]] 소현리(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에 [[백봉서원]](白峯書院, 다른 이름은 봉양서원(鳳陽書院))이 건립되어 제향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관작과 시호가 추탈되었다가 [[1697년]] 복권되었으나, [[1701년]] [[무고의 옥]] 때 다시 추탈되었다. [[1795년]](정조 19년) [[10월]] [[조선 정조|정조]] 때 가서야 최종적으로 복권된다.
 
그의 문집인 《남파문집》 13권은 [[1782년]](정조 6) 그의 4대손 홍복전(洪福全)이 백봉서원(白峯書院)의 유림들의 도움으로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건립된 계고당(稽古堂)에도 제향되었다가 [[1871년]](고종 8)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가 배향된 계고당은 건물이 해체되고, <계고당기(稽古堂記)>와 다수의 서적이 보관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친필(親筆)인 계고당 [[현판]]은 보존되고, 영정(影幀) 등은 산실 되었으나, 그 일부가 [[안성산업대학교]] 도서관(安城 産業大學校 圖書館)으로 이관되어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