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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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Andong-Dosan Seowon 2985-06 Sisadan Stele.JPG|시사단(試士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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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 서자 출입 허락 사건 ===
도산서원은 교육기관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이었지만, [[영남]] [[안동]]과 주변지역 사림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1884년]] [[서얼]]들이 도산서원 출입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원에서는 끝까지 허락할수 없다고 거절했고, [[서얼]]들과 서원 유사(有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서자들의 서원 출입 허락 상소가 계속되자 [[1884년]](고종 21년) 조정에서는 서얼들도 서원 출입을 허용하라는 공문인 관문(關文)을 각 관아와 서원에 하달하였다. [[1884년]] [[11월]] 조정에서 하달한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들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주 옥산서원]]은 곧 [[서얼]]의 서원 출입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서자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옥산서원의 사정이지 도산서원은 적용할수 없다며 거절했다.
 
분개한 서얼들이 단체로 도산서원을 찾아와 드디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서얼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 [[서얼]]들에게 서원의 수노(首奴)들은 몰매를 맞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유사 등 임원은 [[서얼]]들에게 잡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패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 이를 두고 서원 측에서는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 사태가 진정된 후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으며, 이를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 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라 부른다.
 
[[서자]]들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폭력을 행사하자, 결국 관망하던 [[군청]]이 개입했다. [[1885년]] [[2월 10일]]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하려 한다"며 관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관아가 개입하자 [[서얼]]들 무리 사이에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남아 있다가 붙잡혀 구금되고 일부는 자기 집안에 끌려가 문벌(門罰)을 받았다. 문벌을 받은 서얼들은 관아의 판결에 불복하고, 이후 안동권 곳곳의 다른 서얼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 결국 [[서자]]들과 도산서원의 갈등, 대립은 2년 1개월간 계속되었고, 결국 [[1888년]] [[12월]] 서자들의 출입 요구가 관철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