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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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일빛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5645-064-3}} p24~p25</ref> [[청일전쟁]] 이후 산둥 성 전체 108개 주현 가운데 72개 주현에 교회의 거점이 마련되고, 크고 작은 교회는 1300여개, 150여 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만 하더라도 8만 명에 달했다. [[교회]] 세력은 열강의 힘을 배경으로 불법을 일삼고 일반 민중에 압력을 가하여 도처에서 교안이[[교안]]이 일어났다. 교안이[[교안]]이 일어나면 관청을 압박하여 민중을 진압하고, 배상금을 요구하여 산동인들과 지방관들도 [[교회]]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높았다.<ref name="반기독교"/> 그리고 [[1898년]] 5월에 영국군이 강제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점령<ref>《세계의 역사》,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저. p88</ref> 하고 조차한 것도 산동인들의 위기의식에 크게 자극하였다.<ref name="ab"/>
 
이 밖에 자연재해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도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자연재해는 19세기 후반부터 [[화북]] 지역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산둥 성]] 지역은 [[황하 강]]의 하류에 있기 때문에 [[즈리 성]], [[허난 성]]과 함께 그 피해는 더욱 컸다. 특히 [[1898년]]에 더욱 심하여 아사자만 16~17만 명이나 되었으며, 가옥을 비롯한 농경지 피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다. 같은 [[산둥 성]]이라 하더라도 서부는 작물생산이 불리한 조건이나 동부 반도지역은 관개가 잘되고 재해도 적어 경제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자연재해 환경과 열강의 이권침탈, [[기독교]]의 활동은 [[의화단]]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ref name="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