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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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의 금슬: 여기서 말하는 소조와 빈궁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아니라 정조와 효의왕후가 맞습니다. 이미 사도세자가 죽은 지 14년 뒤인 1776년의 기록이기 때문이죠. 이 때의 소조(동궁)은 정조, 빈궁은 효의왕후였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뒷 부분에 소조가 은언군의 아들을 아꼈다고 되어 있는데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은 사도세자가 죽고 7년 뒤에나 태어났기 때문이죠. 또한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2남 2녀를 둘 만큼 금슬이 좋았고, 사도세자는 이미 젊은 나이에 여러 궁인들에게서 자식을 보았기 때문에 가까이 하는 궁인이 없었다는 기록과는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중록에도 기록되어 있다시피 정조와 효의왕후의 금슬은 좋지 못했고, 정조는 의빈 성씨 외에는 가까이 하는 궁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 기록과 부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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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와의 금슬 ==
 
{{인용문|小朝 於嬪宮 琴瑟不甚和諧 而宮人 亦無一進者 一王孫恩彦君 宋樂休女壻也 有一子 極被小朝撫愛云, 소조([[정조]])가 빈궁([[효의왕후]])과 금슬이 심하게 좋지 못했고, 가까이 하는 궁인도 없었다. 일왕손 [[은언군]]은 송낙휴의 사위인데 아들([[상계군]])이 하나 있었다. 소조가 그를 아꼈다.|이재 [[황윤석]], 《[[이재난고]]》}}
 
{{인용문|'''[[정조|세손]]이 본디 성품이 담담하여 [[효의왕후|빈궁]]과 금실이 친밀치 못하신데다가''', [[화완옹주|정처]]가 손에 화와 복을 쥐고 앉아 죽음을 마다않고 세손의 부부 사이를 말리니, 설사 화락하고자 하신들 어찌 감히 하실 수 있으리오. 이리 하여서는 후사를 볼 가망이 없으니, 아버지께서는 세손 부부가 금실이 좋아져 쉬 원자 생산하시기를 밤낮으로 빌고 비시니라. 그리고 아버지께서 궁궐에 들어와 세손을 뵐 때면 "그리 마소서" 간절히 간언하시고, 다른 형제들도 근심과 탄식이 측량할 수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