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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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번째 줄: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진압작전 중 사망한 군인은 180여명, 사망 경찰관은 140여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ref>김영주, 〈'4·3희생자' 21%가 여성〉,《대한매일》2001.6.2.
</ref>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우익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매 해 4월 3일 같은 날 제사를 하는 제주도민이 상당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37104|제목="어릴 적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인 것 알고 충격"|날짜=2017-07-01|확인날짜=2018-03-13}}</ref>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대한민국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48051 6.25 전쟁과 해병대]</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4&aid=0000006656 제주 해병의 날]</ref>
 
그밖에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등의 반공 우익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380385 | 제목 = 그때 오늘‘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이 시작되다 | 출판사 = [[중앙일보]] | date = 2010.08.13 | accessdate = 2010-12-18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