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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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즉위: 프라하 협정->이흘라바 협약
→‎국왕 즉위: 평화 연맹 제안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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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주의를 추구하는 이르지의 등장은 후스주의 2세대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인바. 2세대 후스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의 시기로서 이르지는 평화와 질서를 표방하면서 두 종파간의 화합을 모색하였다. 교황파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그의 온건한 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외국인 지배자를 싫어하는 민중의 감정을 고려하는 등 이르지에게 투표했다. 이르지는 프라하 협정에 따른 온건한 통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부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지만 이르지와 적대 관계에 있던 [[교황 비오 2세]]는 포데브라트 가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후스전쟁]]의 종전을 선언한 1436년의 이흘라바 협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1462년]] 이르지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현재의 [[유럽 연합]]과 같은 유럽의 단일 기구를 수립하는 급진적인유럽 군주들의 '평화 제안을연맹'을 냈다제안했다. 이르지의 제안에 따르면 보헤미아를 포함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권자들과 제후들이 [[기독교]] 세계의 동맹 관계를 수립하고 나중에 [[스페인]]이 추가로 합류하는 방식이었다. 이르지의 제안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인 성격("유럽"이라고 명시하지 않았음)이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끔찍한 터키인"([[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이르지는 특사를 파견해 유럽 국가들의 궁정에 특사를 파견하여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르지는 이 조약이 [[1464년]]에 발효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로마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던 이르지의 구상은 좌절되고 만다. 1464년 보헤미아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구상하던 교황 비오 2세가 사망하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르지는 교황 바오로 2세와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새 교황도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