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용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토막글 정리
10번째 줄:
그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이준용]], [[이재면]] 등이 [[이재선]]의 묘소를 대신 돌보았고, [[이준용]] 등이 대신 성묘를 하였다. [[1900년]]대 말까지도 이준용이 대신 성묘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 등에 나타난다.
 
[[1907년]]에는 양아버지 [[이재선]]은 복권되고 완은군에 추증된다. 조선의 왕족들이 왕궁에 출입할때 함께 출입, 문안하는 등의 예우는 지속되었다. 1912년 양궁에 [[이재면|이희]], [[의친왕|이강]], [[이준용]] 등과 출입하였으며, [[1921년]]말에 부상을 당하여, 그해 [[12월 8일]]에는 부상 치료차 [[대한제국 순종|순종]]으로부터 60원을 하사받는다.
 
그는 한때 [[주식]]투자 등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양어머니 신씨가 파양을 청하는 소송을 올렸다. 그러나 경성지방법원은 조선사회의 통념상 안되며, 그가 양자로 오래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57번째 줄:
* [[이재선의 난]]
* [[한일 합방]]
* [[이완용]]
 
== 각주 ==
65번째 줄:
* 순종실록 부록
* 선원보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토막글|한국 사람}}
{{토막글|조선}}
{{토막글|한국 근현대사}}
 
[[분류:생몰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