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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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 출생과 가계 배경 ====
[[파일:Coat of Yun Seoneun.jpg|thumb섬네일|left왼쪽|180px|윤선언의 단령<br />(그의 조부 윤의중이 입던 옷으로 생부 윤유심이 물려 입다가 뒷날 형 윤선언의 수의로 쓰였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후일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생부인 예빈시직장 [[윤유심]](尹唯深)과 생모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큰아버지 [[윤유기]]는 어초은 윤효정의 4대 종손이었으나 늦도록 아들이 없었다.<ref name="daum0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091a daum:윤선도]</ref> 생부 윤유심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지만, 양아버지 윤유기는 관찰사(觀察使, 종2품)에 이르렀다. 생모 안씨는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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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에 그는 후사가 없던 숙부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6월 2일]]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동인 유생唯幾)에게 양자로 입양할 것을 신고하여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ref name="yang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8243 19 종통 계승을 위한 안전장치 입양 - 오마이뉴스]</ref>
 
[[파일:1595 고산 윤선도 입양 예조 문적.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60px|윤선도의 입양 문적 ([[1595년]], [[예조]] 발행)]]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고조할아버지는 어초(漁樵) [[윤효정]](尹孝貞)으로 그는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사림이 학살되자 관직에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다. 증조할아버지 윤구(尹衢)는 [[조선 중종|중종]] 때 홍문부교리(弘文副校理)를 지냈으나, [[기묘사화]]로 희생되어, 기묘명신(己卯名臣:기묘사화때 화를 입은 사림)으로 기묘당적(己卯黨籍: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의 약전)에 실려 있다. 증조부 윤구눈 윤홍중과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윤의중(尹毅中)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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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생활 초반 ====
===== 문과 급제와 대군 사부 시절 =====
[[파일:YunSeondo seosin1654.jpg|thumb섬네일|200px|right오른쪽|윤선도 서신 ([[1654년]] [[1월]])]]
 
[[1625년]](인조 5년)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1627년]]에는 안기[[찰방]](安奇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27년 [[10월]]에 중직대부로 승진하고 [[사포서]]별제(司圃署 別提)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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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 왕자사부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겸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1630년]](인조 8년)초 병으로 공조좌랑을 사직했다. 그러나 그해에 [[공조]][[정랑]],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1630년]] [[8월 1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로 전임되었다. [[1630년]] [[10월]]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뒤 12월 특명으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직하였다.
 
[[파일:윤선도 거문고 01 .jpg|thumb섬네일|left왼쪽|180px|거문고 '아양' (윤선도 거문고)<br />(윤선도 생전에 타던 거문고로, 그는 자신의 거문고를 아양 이라 이름붙였다.)]]
 
[[1631년]] [[6월]] [[호조]][[정랑]]에 임명되고 [[총융청]]랑(摠戎廳郞)을 겸하였으나 그해 [[9월]]에 호조정랑을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1월]]에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32년]] [[1월]] 오랫동안 왕자의 사부로 있었다 하여 특별히 호조 정랑(戶曺正郞)으로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임하였으며, 그해 [[2월]] [[사복시]] 첨정(司僕侍僉正)으로 승진했다가 지평 지덕해(池德海),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이 사직서를 냈다. [[1632년]] [[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을 사퇴하고, 겸임하던 [[왕자사부]]직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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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보길도 은둔 생활 =====
[[파일:Kanghosasisa of Yun Seondo.pn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80px|작품 [[강호사시사]]의 한글본]]
 
[[조선 인조|인조]]의 피난 행렬 근처에 있었으나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인]]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해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거부했었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경상북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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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예송 논쟁과 유배 =====
[[파일:Korea-Portrait of Song Siyeol-Joseon.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00px|정적이자 경쟁자인 [[송시열]]<br />(그는 [[서인]], [[노론]]의 영수였다. 그는 효종이 차남이므로 왕위를 계승했더라도 차남의 예로서 1년복을 주장했다.)]]
{{참고|예송}}
이때 그는 [[복제]] 문제를 걸고 넘여진다. 효종이 죽자 [[송시열]]과 [[송준길]],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들은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제는 차자로서, 적장자 이외에는 모두 서자로 본다는 [[주자]]가례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선도는 효종이 인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어떻게 차남이나 서자로 격하하려는 수작을 부리느냐며 항의하였다. 그는 일찍이 [[송시열]]을 "시열은 도리어 문과수비(허물을 감추고 뉘우치지 않음)하려는 꾀가 있어서 예경(禮經)의 글자들을 주워 모아 자기의 뜻에 맞게 부회하니 그 사설이 번거롭기만 합니다.<ref name="bulggotnam">[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112170280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두 개의 초상, 고산 윤선도] 조선일보</ref>"라고 평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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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윤선도는 상소를 올려 효종이 왕통을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예로써 3년 상복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효종은 가계상 차남이 맞으므로 장남 이외의 자식들의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인측에서 어머니(계모도 어머니로 간주한다.)를 신하로 삼는 예가 어디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해온다. 이 과정에서 윤선도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다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몰고 온다. 종통과 왕통이 따로 있을수 있느냐는 이론을 제기했고, 이는 종통과 왕통을 분리한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고가는 이론적 근거가 된다.
 
[[파일:허목1127.jpg|thumb섬네일|left왼쪽|180px|미수 [[허목]]<br />(윤선도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3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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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방 운동 ====
[[파일:Sanjungsingok.jpg|thumb섬네일|left왼쪽|210px|작품 [[산중신곡]]]]
{{참고|산중신곡|어부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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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방과 낙향 ====
[[파일:Yun Seondo 1671 2.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30px|윤선도의 친필 서한]]
 
[[1667년]] [[6월 8일]](음력 윤4월 17일)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윤선도의 석방을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음력 5월 11일]]) 유학 [[이석복]](李碩馥) 등이 윤선도의 사면, 석방을 상하였다. 고민하던 [[조선 현종|현종]]은 그해 [[9월 8일]]([[음력 7월 21일]])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8월]]에 [[해남군|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9월]]에는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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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파일:Yunhyu.jpg|thumb섬네일|120px|left왼쪽|[[윤휴]]]]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樂書齋)에서 사망하였다.<ref name="youn2007"/>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 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해남군 현산면 문소동과 [[해남군]] 삼산면의 경계 지점)에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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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학문과 시문은 [[이서우 (1633년)|이서우]]를 통해 [[이익 (1681년)|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夢天謠) 5수, <우후요>(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파일:Heo Jeok.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30px|[[허적]]]]‎
 
[[1672년]] [[12월]] [[조선 현종|현종]]은 특명을 내려 선왕과 자신의 스승이던 그의 직위와 작첩을 되돌려주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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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술 작품 ==
[[파일:Gosanyugo.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80px|저서 [[고산유고]]]]
단가와 시조 75수를 창작하였다. 시가 중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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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쇄동기》
* 《병진소》
* 《고산소초》
* 《경모첩》
* 《장원급제답안지》
* 《영모첩》
* 《고산서찰》
* 《금쇄동집고》
* 《은사첩》
* 《고산양자 예조입안 문서》
* 《증이조판서 윤공시장》
=== 작품 ===
* 이필행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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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파일:Korea-National.Treasure-240-Yun.Duseo-Joseon-Private.jpg|thumb섬네일|170px|증손자 [[윤두서]]의 자화상]]
윤선도의 본처 남원 윤씨의 친정아버지 [[윤돈]](尹暾)은 백호 [[윤휴]]의 친족이기도 하다. 또한 증손자는 화가 [[윤두서]]이고 정약용이 윤두서의 외증손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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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7세기 한국 사람]]
[[분류:진사 (칭호)]]
[[분류:17세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