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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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게 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정치인과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를 [[오적 필화 사건]]이라 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고, 아들 김원보, 김세희 형제가 태어났다. 그러나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체포되고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해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 등 해외 문인 및 지식인들과 연대해 김지하 시인에 대한 '사법 살인'을 막자고 나섰고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같은 해 3월 13일 서울에서 원주 집으로 가려고 나오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 다시 구속되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18821.html '유신 광기 절정... 김지하의 신변에 불길한 예감'], 《한겨레》2012년 2월 14일자</ref> 이후 재판을 받고 다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 [[1980년대]] 이후 ===
[[1980년대]] 이후, 각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 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명에 대한 그의 존중심에서 나온 비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비난과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박두진]], [[고은]]의 시, [[황석영]], [[최인훈]], [[이청준]], [[박경리]] 등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도 유럽과 [[미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시위에 나서기로 하면서 2001년 5월 4일 서울 시청 앞에서 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과 대외협력위원장인 소설가 이경자, 그리고 자유실천위원장인 소설가 김영현과 함께 차례로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했다. <ref>한겨레신문 국제 | 문화>출판 | 문화] 2001-05-07 / 최재봉</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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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산문학상 수상자]]
[[분류:사상계]]
[[분류:20세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