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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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게 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정치인과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를 [[오적 필화 사건]]이라 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고, 아들 김원보, 김세희 형제가 태어났다. 그러나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체포되고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 [[1980년대]] 이후 ===
[[1980년대]] 이후, 각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 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명에 대한 그의 존중심에서 나온 비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많은 이들의 비난과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박두진]], [[고은]]의 시, [[황석영]], [[최인훈]], [[이청준]], [[박경리]] 등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도 유럽과 [[미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시위에 나서기로 하면서 2001년 5월 4일 서울 시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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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산문학상 수상자]]
[[분류:사상계]]
[[분류:20세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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