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하 노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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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시조 = 노강필(盧康弼)
| 집성촌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서천군)|기산면]] 두북리</br> [[강원도]] [[김화군]] [[원화면]] 추의리</br>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두목리</br> [[황해도]] [[금천군]] 우봉면 용성리<br>[[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암리
| 인물 = [[노영순]], [[노탁유]], [[노효돈]], [[노책]], [[순비 노씨|순비노씨]], [[노한]], [[노사신]], [[노공필]], [[노용호]], [[노재현]], [[노승환]], [[노재원]], [[노태우]], [[노승우]], [[노박래]], [[노철래]], [[노준형]], [[노대래]], [[노웅래]], [[노영민]], [[노홍철]]
| 년도 = 2015
| 인구 = 61,747명
 
== 인물 ==
* '''[[노안맹]]'''(盧安孟,; 2세조2세) :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은청광록대부 상장군에 올랐다.
* '''[[노영순]]'''(盧永淳,; 3세조3세, [[1146년]] ~ [[1208년]] ) : [[고려]]의 대신으로 참지정사와 상서좌복야,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이광필]]의 딸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이씨이다. [[1170년]](의종 24년) [[무신의 난]]때 [[고려 의종|의종]]을 시종하였으나 대대로 무인가문의 자손이라하여 화를 면했다.
* '''[[노탁유]]'''(盧卓儒,; 4세조4세) : [[고려]]의 무신이다. 1170년 [[고려 명종|명종]]의 즉위를 도와 용호군낭장에 올랐다가 1174년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여 좌우위보승중낭장차수장군(左右衛保勝中郎將借授將軍)에 이르렀다. 1178년 금나라에 만춘절축하사로 다녀왔고, 서북면지병마사 등을 거쳐 1190년 용호군상장군을 지냈다.
* '''[[노연]]'''(盧演,; 7세조7세) : [[고려]]의 무신으로 은청광록대부 북계병마사를 거쳐 지제고를 역임하였다.
* '''[[노경륜]]'''(盧景倫,; 8세조8세) : [[고려]] 충렬왕 때 전라도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 노영수(盧頴秀,; 9세조9세) : [[고려]]의 문신으로 이부상서와 밀직사좌승지를 지냈다. 원간섭기에 몽골어 통역관으로 시작해 문하시중까지 지낸 평양군(平壤君) [[조인규]] 딸과 혼인해 사위가 되었고, 후에 [[충선왕]]도 [[조인규]]의 딸을 왕비로 맞아 왕과 동서지간이 된다. 시호는 의열(懿烈)이다.
* '''[[노책]]'''(盧𩑠,; 10세조10세, ? ~ [[1356년]]) : [[고려]]의 문신으로 왕실의 평양공(平陽公) 왕현(王昡)의 딸 경녕옹주(慶寧翁主)와 혼인하였다.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딸이 원나라의 순제비(順帝妃)가 되었으나,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기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교하 노씨는 노책의 네 아들을 파조로 하는데, 노제(盧濟)의 후손이 서원군파(瑞原君派), 둘째 [[노진]](盧稹)의 후손이 창성군파(昌城君派), 노은(盧訔)의 후손이 경원군파(慶原君派)이고 노영(盧渶)의 후손이 신양군파(新陽君派)로 나누어 진다.
* '''[[노진]]'''(盧稹) : 창성군파 파조. [[고려]] [[공민왕]]이 [[기철]]을 숙청할 때 먼 곳으로 귀향을 갔다가 복권되어 밀직사판사를 제수받았으나, [[자제위]]에 소속되어 있던 둘째 아들 [[노선]](盧瑄)이 [[홍철]] 등의 [[공민왕]]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나머지 아들 [[노정]](盧禎), [[노숙]](盧璹), [[노균]](盧鈞)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위가 [[공양왕]]에 오르면서 제효공(齊孝公)으로 추증되었다.
* '''[[노한]]'''(盧閈, 1376년 ~ 1443년) :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노진]]의 손자이자 [[노균]]의 아들이며 [[조선 태종|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제부가 된다. 증조부는 고려 좌정승을 지낸 [[노책]]이다. 1434년(세종 16)에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다음 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이 되어 판병조사를 겸했고, 1437년(세종 19)에 영경연사를 겸했다.
* '''[[노윤보]]'''(盧允寶) :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공양왕]]때 도감판관행랑장(都監判官行郞將)을 지냈다. [[노진]]의 증손자이고 [[노숙]]의 손자이다. 목은 [[이색]]과 교류하였으며 이색의 본향인 충남의 한산이씨가문에 장가들었다가 고려가 망하자 한산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자손들이 충남 서천에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 '''[[노사신]]'''(盧思愼, 1427년 ∼ 1498년) : [[노한]]의 손자이며, 할머니는 [[원경왕후]]의 여동생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처제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의 여동생으로 [[세종]]의 처제로 2대에 걸쳐 왕실과 인척관계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사헌부지평 등을 지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도승지에 올라 국가의 기무(機務)를 관장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 1492년(성종 23)에는 좌의정, 1494년(성종 25)에는 부원군(府院君)에 봉군, 1495년(연산군 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 '''[[노공필]]'''(盧公弼, 1445년 ~ 1516년) : [[노사신]]의 아들. 1466년 춘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1483년 [[대사헌]], 1489년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1500년 교성군에 봉해지고 1503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올랐다가 중종반정 후인 1507년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명나라로 가서 중종의 즉위 경위를 설명하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관직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14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공편(恭褊)이다. 아들 노섭(盧燮)은 사복시 첨정 등을 지냈다.
* '''[[노봉천]]'''(盧奉天, 1594년 ~ 1637년) :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 노경천(盧擎天)과 함께 충청감사의 군영에 합류하여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구하기 위해 선봉장으로 나서 싸우다 전사하고 후에 숙종 16년(1690)에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호는 병암(屛庵), 자는 여주(汝柱)이다. 창성군 [[노진]]과 충남 한산(서천)에 정착한 [[노윤보]]의 후손이다. 1617년에 음직으로 예빈검정(禮賓儉正)이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에는 북쪽의 여진족이 소란을 피우자 출전하여 큰공을 세웠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웠다.
* [[노용호]](盧龍鎬, 1904년 ~ 1970년) : 제1대 [[법원행처장]]
* [[노승환]](盧承煥, 1927년 ~ 2014년) : 제8·9·10·12·13대 국회의원. 민선1·2기 마포구청장.
* [[노재원]](盧載源, 1932년 ~ 2006년) : 제1대 駐 중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