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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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과 대한제국 대황제의칙위가 없는 조약이어서 을사보호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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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eongdong19.jpg|섬네일|[[중명전]]에 전시된 을사조약 문서]]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과정}}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제2차 한일 협약'''(第二次韓日協約)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을사]]년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을사협약(乙巳協約), 을사5조약(乙巳五條約), 또는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는 목적으로는 을사늑약(乙巳勒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보통 제2차 일한 협약({{llang|ja|第二次日韓協約|다이니지닛칸쿄야쿠}}) 또는 일한보호협약({{llang|ja|日韓保護条約|닛칸호고조야쿠}})이라고 부른다.
[[1965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를 통해 이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 배경 ==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기에 앞서 1903년 12월에 이미 [[대한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둘 것을 내각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그에 따라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황성을 점령함과 함께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며,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여 이른바 공수동맹을 맺고 전쟁에 대한 지원을 받았다. 이 전쟁으로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손을 뗀다.
이 이후 [[대한제국 고종]]이 [[제1차 한일 협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하는 밀사를 파견하자 이를 구실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2차 한일
== 조약체결 ==
=== 체결의 경위 ===
[[파일:Jungmyeongjeon 02.JPG|섬네일|을사조약이 조인된 [[중명전]]]]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대한제국 고종]]에게 천황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 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한국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駐)한국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 받아 궁궐<ref>제2차 한일 협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8/005000000200408271743670.html 〈‘을사조약 중명전’ 버려진 역사〉], 한겨레, 2004.8.27.</ref>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ref name="망언뿌리">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서적 인용
| 저자=한계옥
| 기타=조양욱
| 제목=망언의 뿌리를 찾아서|날짜=1998-04-10
| 판=1판 1쇄
| 출판사=(주)자유포럼
| 출판위치=서울
| id=ISBN 89-87811-05-0
| 쪽=97~106쪽
| 장=무력을 앞장 세워 병탄으로
| 인용문=
}}</ref>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 (1858년)|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 대신 가운데 5 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서적 인용
| 저자=김삼웅
| 제목=친일정치 100년사
| 날짜=1995-07-01
| 출판사=동풍
| 출판위치=서울
| id=ISBN 978-89-86072-03-7
| 페이지=50-53}}</ref>
=== 조약 내용 ===
조약은 전문과 5개 조항, 결문,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서명으로 되어 있다. 전문에는 ‘한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의 공통 이해를 위해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라는 형식상의 명목과 조건이 붙어 있다.
{{인용문|
#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정부는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ref>원문은 [[:s:을사조약|〈을사조약〉 - 위키문헌]] 참조</ref>}}
== 체결 직후 ==
제2차 한일 협약의 체결로 한국 내의 공사관들은 모두 철수하였다. [[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이 조약의 강압은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고, 식민지화하려는 [[일본 제국]]의 흉계가 숨겨져 있었다. 이 이후에 [[한일신협약]]과 [[기유각서]] 등을 [[이완용]]의 내각과 일본의 한국[[통감부]] 사이에서 체결하여, 한국의 국권을 점차 침탈해갔다. [[1910년]]([[융희]] 4년)에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 반대 운동 ===
[[파일:Yoon01.jpg|섬네일|[[윤치호]]]]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국적인 항일운동([[을사의병]] 참조)이 전개되었으나 일제는 이를 억압하였다. [[1905년]] [[12월 1일]] [[윤치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인용문2|지난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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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길은 자강(自強)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宮房)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宮人)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대한 광무 9년 양력 12월 1일 자 5번째 기사}}
그러나
== 조약의 무효성 ==
=== 고종의 무효 선언 ===
[[파일:Eulsa retraction.jpg|섬네일|영국에 전달된, 제2차 한일 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
이후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고종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고종의 을사체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에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고종의 위임장 등이 있다.<ref>
더글라스스토리 , 《고종황제의밀서》(글내음, 2004년)</ref>
=== 대한민국과 일본의 무효 재확인 ===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프랑스 국제법학자 레이는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당시 강박(強迫)이 사용된 점과 고종이 그 조약이 불법이고 무효인 점을 밝히기 위해 즉각 항의 외교를 벌인 점을 들어 ‘1905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ref>Francis Ray, "La Situation Internationale de la Coree", ''Revue General de Droit International Public,'' Tome XIII, 1906, pp.40-5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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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가쓰라-태프트 밀약]]
* [[한국병합시말]](韓國併合始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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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위키문헌|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5/02/009000000200502171936182.html “을사늑약 무효다”], 한겨레, 2005.2.17.
* [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5/05/003000000200505311822049.html 일 사학자들 “을사조약ㆍ한일병합 합법·유효”], 한겨레, 200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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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분류:을사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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