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56번째 줄: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을 명령받고 왜로 돌아가지만, [[1596년]] 지진이 났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제1군 사령관으로 왜선 300여 척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게끔 명령받았다. 정유재란 시에는 전라도 지역을 주로 공격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keyword=%EB%85%BC%EB%A6%AC 조선왕조실록]</ref>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 지구전을 전개할 축성하고 [[울산성 전투]]에서 농성하였으나 명과 조선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우물의 식수가 차단되어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병사 대다수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갈증과 아사로 죽어갔다. 가토 기요마사도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는 과정{{출처|날짜=2014-07-20}}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위시한 [[문치파]]와 계속 대립하여 내분을 빚었다. [[1598년]]이 되자 서생포왜성이 [[명나라|명]]의 제독 [[마귀 (명나라)|마귀]]에 의해 함락되었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패전한 모든 병력을 왜로 철수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음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택을 습격하였으나 살해에는 실패하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에 가담하여 승리하고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인연으로 고니시 가문의 일가를 말살하는것을 막았고 고니시의 일가를 하녀,하인으로 받아들여 돌봐주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울산성의[[울산성]]의 교훈으로 [[구마모토 성]]을 건설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 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 시|구마모토]]에서 죽었다. 50세.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면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권력 앞에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 애쓴 이중성 태도로 말미암아 일설에 의거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중재하려고 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평소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하게 하려고 계획한 이에야스의 미움을 사 독살되었다고도 한다.{{출처|날짜=2014-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