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16세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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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567년]](명종 22년) 무과에 급제해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그 뒤 북방의 외직을 전전하며 북방에서 변경을 수비, 그 후 내직으로 복귀하여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지냈다. [[1592년]] 당시 조선수군의 [[낙안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과 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워 활약했다.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 [[1596년]] 조선에서 역병이 생기자 한산도 기지에서 백성과 수군들이 8,000명에 가까운 병사자들이 속출되었다. 약재와 의료품도 매우부족한상황이였고매우 부족한 상황이였고 [[이순신]]은 조정에 바칠 세금과 군량비를군량미를 약재와 의료품으로 바꿀려고했으나 부하들은수군장수들은 그것을 말렸기 때문에 결국은 조정에 바칠수밖에 없었다. 신호는 죽어가는 조선수군과 한산도 백성들을 위해 그 세금과 군량비를 단독으로 몰래 약제와 의료품을 구매했다. 조정에 보낼 세금과 군량비를군량미를 단독으로 약제와 의료품을 구매하여 한산도의 수군과 백성들을 죽게놔둘수없다는 이유로 조정에 사용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수군과 한산도 백성과 이순신을 위해 스스로 모든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였고 조선육군으로 근무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교룡산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 군을 맞았으며, 그해 8월 [[남원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올라온 [[이복남]]의 5천 군사와 합류하여 [[남원 전투]]에 참전했다가 [[작전 중 사망|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