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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영조 3년([[1727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ref>가감역은 임시로 설치한 선공감에 소속된 종9품 벼슬</ref>)으로 임명했으나 사은한 뒤 관직을 사퇴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로마 가톨릭|서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天文略)》, 《[[천주실의|천주실의(天主實義)]]》, 《주제군징(主劑軍徵)》,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연구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들이 대량으로 희생되면서 그의 문인들도 일부 희생되었다. [[1729년]] 47세49세 때 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듣고 몇 차례 벼슬을 내리고자 불렸으나, 한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성포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니, 그가 주장한 ‘사농합일(士農合一), '선비는 농사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교]]의 이론을 직접 실천하였다. 그 뒤 우로예전에 따라 [[노인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60대 이후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지져 고통받았다. 만년에는 아들을 일찍 여의고 칩거하였으며, 70대 후반에 들어서는 풍 비슷한 질환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1751년]]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강세황]]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 강세황은 도산서원도를 그렸는데, 이때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ref>[http://www.ocp.go.kr:9000/n_dasencgi/full.cgi?v_kw_str=&v_db_query=A1%3A12&v_db=1&v_doc_no=00010252&v_dblist=1&v_start_num=601&v_disp_type=2 도산서원도]</ref> 그는 도산서원도를 애장품으로 하여 머리맡에 두고 보았다. 그는 평생 [[주자]]-[[이황]]-[[허목]]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학문의 정통으로 확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