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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식 =
| 전임자 = [[콘라두스 1세]]
| 후임자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 작위2 = [[작센의 군주|작센의 공작]]
| 재위2 = 912년 11월 30일 - 936년 7월 2일
| 전임자2 = [[오토 1세 (작센)|오토 1세]]
| 후임자2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 배우자 = [[하테부르크]] <br /> [[마틸데 폰 링겔하임]]
| 자녀 = [[탕크마르]] <br /> [[하드비히 폰 작센]] <br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 <br /> [[게르베르가 폰 작센|프랑스 왕비 게르베르가]] <br /> [[하인리히 1세 (바이에른)|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 <br/> 쾰른 대주교 [[브룬 폰 작센|브룬]]
| 왕가 = [[오토 왕가|오토 가문]]
| 아버지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 어머니 = [[헤트비가]]
}}
912년 아버지 오토의 뒤를 이어 작센공작이 되었고, [[918년]] 아들이 없던 [[콘라두스 1세]]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임기간 중 [[로트링겐]]을 정벌하여 독일의 영토([[로렌]])에 편입시켰다. [[로렌]] 정벌 이후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로트링겐]]의 왕이었던 [[기셀베르트]]와 협상, 기셀베르트에게 딸 마틸다를 주고, 기셀베르트를 로렌의 공작으로 임명하는 대신 기셀베르트는 하인리히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933년]] [[헝가리인]]들의 침략을 격퇴하고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그의 대에 한한 것이었다. 그는 [[동프랑크 왕국]] 영토 동부에 요새를 건설하였고, [[기병]]을 양성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당시 왕권은 기초가 약했으며, 그는 재위 기간 중 동프랑크 내 귀족들의 반대와 반발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임자인 콘라두스 1세와는 달리 왕국 내에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포기하였다. 그는 자신의 직할 영지인 [[작센]]의 발전에 힘쓴 것이 지방 제후들의 호감을 사기도 했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의 아들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포하여 왕위를 성공적으로 계승시켰다. 한편 본부인의 아들 [[탕크마르 (동프랑크)|탕크마르]]는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그는 처음으로 [[독일국]] 또는 [[독일인]]의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설립하였으며 첫 부인 마틸다가 묻힌 퀘들린 부르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는 두 딸을 통해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 [[루이 4세]]의 외할아버지이자, [[위그 카페]]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 생애 ==
[[906년]] 그는 [[작센]] [[백작]]이자 [[메르게부르크]] [[백작]] [[에르빈]](Erwin)의 딸 [[하테부르크 폰 메르게부르크]](Hatheburg von Merseburg)와 결혼하여 첫 아들 [[탕크마르 (동프랑크)|탕크마르]]<ref>938년 이복 동생 오토 1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다.</ref>를 얻었지만, 하테부르크가 첫 남편이 죽은 뒤 [[가톨릭]] 수녀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결혼의 합법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국 [[909년]]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909년]] 겨울, 하인리히 1세는 하테부르크와 헤어지고, 곧 [[베스트팔렌|베스트팔리아]] [[백작]] [[테오도리히 (작센)|테오도리히]] 또는 [[디트리히]]의 딸 [[마틸다 폰 링겔하임]](Matilda von Ringelheim)과 재혼하였다.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두 번째 부인 마틸다는 사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하인리히가 비두킨트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두번째 아내 마틸다 폰 링겔하임은 비두킨트의 5대손이 된다. 마틸다와의 결혼으로 그는 [[작센]]의 서부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마틸다는 그에게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브루노, [[하인리히 1세 (바이에른)|바이에른 백작 하인리히 1세]] 등의 아들과 게르베르가, 헤드비가(또는 헤드비히) 등의 딸을 낳았다. 게르베르가는 하인리히의 생전 로렌의 공작 기셀베르트에게 결혼 동맹으로 시집보냈다가, 기셀베르트 사후 아들 오토 1세가 다시 서프랑크의 루이 4세에게 정략결혼으로 결혼시킨다. 다른 딸 헤드비가는 서프랑크 왕국의 [[로베르 1세]]의 아들이자 유력 귀족 위그 르 그랑에게 시집갔는데, [[프랑스]] [[카페 왕조]]의 첫 번째 왕 [[위그 카페]]가 하인리히 1세의 외손자가 된다. 마틸다는 [[퀘들린 부르크 수도원]](Quedlinburg Abbey)을 설립하는데 여기에 훗날 마틸다와 하인리히 본인이 매장된다.
 
아버지 오토는 동프랑크 왕국의 유력 귀족으로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동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오토는 강력한 경쟁자였던 [[프랑켄]] 공작 [[콘라두스 1세|콘라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오히려 아버지 오토는 908년 무렵부터 [[튀링겐]]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 리아드 전투에서의 승리 ===
그러나 그의 왕권은 불안정했고, 동시에 이민족의 공격과 약탈이 계속되었다. 아들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와 [[잉글랜드]]의 에디트의 결혼식을 계기로, [[930년]] 하인리히 1세는 오토의 결혼식을 마친 뒤 [[아헨]]에서 오토가 자신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동시에 [[프랑켄]] 공작을 비롯한 각처의 귀족들에게 동의하도록 설득하였다.
 
932년부터 마자르 족이 지도자 볼레스쿠(Bulcsú)와 하르카(harka)의 지도 하에 다시 영토를 침략하였다. 933년에 와서 하인리히는 9년의 협정 종료를 이유로 마자르 족에게 더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마자르 족은 다시 동프랑크로 쳐들어왔고, 하인리히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독일 왕국을 침략한 마자르 족을 상대하여 운스타트 강변을 따라 [[튀링겐]] 북부 지역 일대에서 마자르 족을 맞서 싸웠다.
그는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는 한편 독일 내 후작급 반대파 귀족들을 설득했다. 하인리히는 독일을 국가라기보다 여러 부족 공작, 제후들의 연맹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은 포기하고 종주권을 획득하는 선에서 그쳤다. 프랑켄 지역을 복속시키면서도 자치권을 인정하고 명목상의 권리만 행사했을 뿐이고, [[슈바벤]]과 [[바이에른]]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끝내 실패했고, 그는 919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켰지만 부르하르트에게 통치권과 민사행정권을 허락하고 종주권만을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방어하는 한편 왕국 내에서의 권위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가고 싶어했다. 하인리히는 [[로마]] 지역의 정국 불안을 이용하는 한편 그의 무력에 의존하여 로마로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정국 불안 역시 자신이 교황으로부터 황제관을 수여받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이탈리아 방문은 실패하고 만다. 935년에는 [[하르츠]]로 사냥을 나갔다가 뇌졸중으로 되돌아왔다. 936년 초여름에 하인리히는 아들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언한다.
 
[[이탈리아]]로 갈 준비를 하던 도중 [[936년]] [[7월 2일]] 그는 [[튀링겐]]의 [[멤레벤]]의 한 수도원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 사후 ===
그는 자신의 사후 아들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에게 자연스러운 승계를 위해 공동 국왕으로 선포했다. 아들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는 아버지의 영향력에 의해 바로 독일 국왕으로 즉위했고, 이미 즉위한 상태에서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마인츠]] 대주교의 집전 하에 즉위식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오토는 로트링겐, 슈바벤, 프랑켄 공작을 자신의 수행원 역할을 하게 한다. 하인리히는 [[들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1848년]] [[독일]]의 통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요한]]을 비롯한 범독일주의자, 대독일주의자들은 그에게 독일의 모든 부족의 첫 실질적 통치자의 이미지를 부여하려 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 로헨그린(1850년작)에서 하인리히 1세를 캐릭터로 등장시켜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 했다.
 
* 왕비 : 링엘하임의 마틸다, 성녀 마틸다
** 아들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Otto I the Great) 작센 공작, 독일왕, 이탈리아왕, 신성로마황제
** 며느리 : 유디트(잉글랜드의 이디스)
*** 손자 : 리우돌프
== 관련 항목 ==
* [[오토 왕조]]
*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 각주 ==
{{전임후임
|전임자=[[콘라두스 1세]]
|후임자=[[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
|대수=
|직책='''[[독일의 군주|독일 왕]]'''<br /><small>([[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공동 (919 - 921)</small>
{{전임후임
|전임자=[[오토 1세 (작센)|작센 공 오토 1세]]
|후임자=[[오토 2세|독일 왕 오토 1세]]<br />[[작센]] 공으로는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2세]]
|대수=
|직책='''[[작센]] 공작'''
{{전임후임
|전임자=[[베렝가리오 1세]]<br />(924년부터 사실상 공석)
|후임자=[[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br />(사실상)
|대수=
|직책='''[[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