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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배경 ====
허균은 [[1569년]]([[조선 선조|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강릉시|강릉]] [[초당동]]에서 [[군수]]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허엽|초당]](草堂)과 둘째 부인인 강릉 김 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은 그의 이복형이고 [[우성전]]의 처가 그의 이복 누나이며, 후에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송응개]] 등과 함께 계미삼찬으로 몰려 축출된 [[허봉]]과 난설헌(蘭雪軒) 허초희가 각각 동복 형과 누나이다.
 
그의 부친 [[허엽|초당]](草堂)은 [[사림파]]의 일원으로, [[서경덕|화담]](花潭)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한 인물이었다. 부친 [[허엽|초당]](草堂)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동인 (정치)|동인]]의 영수(領袖)가 되었던 인물로, 한때 [[강릉]]의 맑은 물로 [[초당 두부]]를 만들었다. 강릉의 물맛으로 특이한 두부를 만들어 초당 두부의 명성은 [[한성부]]까지 전래되었으나 [[허엽|초당]](草堂)은 관료로서 장사한다고 하여 탄핵받기도 했다. 부친 [[허엽|초당]](草堂)은 [[동인 (정치)|동인]]을 창당한 일원 중 한 사람으로, 후일 허균은 [[동인 (정치)|동인]]에서 분리된 [[북인]]의 일원이고 [[북인]]의 강경파인 [[대북]]의 일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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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때부터 형 [[허봉]]의 벗인 [[이달|손곡]](蓀谷)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9세 때 이미 묘사를 잘하여 시를 잘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외로움을 달래려 더욱 시문 공부에 전념하였다. 첫 스승인 [[이달|손곡]](蓀谷)은 둘째 형의 벗으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았는데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파일:유성룡.png|썸네일섬네일|200px|스승 서애 [[류성룡]]]]
 
후에 [[이달|손곡]](蓀谷)에게 시와 글을 배우다가 매부[[우성전|추연]](秋淵)의 추천으로, 당대 대학자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글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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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
[[파일:Eulbyungjochunrock, Heo Gyun.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40px|을병조천록]]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ref name="dam2"/> [[명나라|명]](明)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파견된 [[심희수]]와 형 [[허봉]]에 이어 그해 [[4월]] [[접반사]]로 [[명나라|명]](明)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월]] 다시 [[명나라|명]](明) 사신 접견에 파견된 원접사의 수행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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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복시|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7월]]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같은 해 [[9월]] [[수안군|수안군수]](遂安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고 [[암행어사]]에게 다시 탄핵받아 벼슬에서 사퇴하였다.
 
[[1606년]] [[4월]]에 원접사 유근(柳根)의 추천으로 [[명나라|명]](明)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종사관으로 [[명나라|명]](明) 사신 주지번을 만나 사서육경과 고전을 막힘없이 대화하며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주지번]]에게 그동안 보관하던 누이 [[허난설헌|난설헌]](蘭雪軒)의 시선집을 명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된다. [[1607년]](선조 40년) [[상의원|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그해 봄 [[삼척군|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1606년 [[명나라|명]]에 [[허난설헌|난설헌]]의 시가 출간되자 조선의 문화를 [[명나라|명]]에 알린 공로로 특별히 삼척부사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직 중 부청 근처의 법당에 출입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목격되어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하고 참선한다는 이유로 1607년 5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받았다. 그러나 [[조선 선조|선조]]는 듣지 않다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이 계속되자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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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방문과 난설헌 문집 편찬 ====
[[파일:허난설헌 문집.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50px|허난설헌 문집 ([[1608년]] 간행본)]]
{{참고|난설헌집|성소부부고|홍길동전}}
 
[[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나라|명]]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허난설헌|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명나라|명]]의 문인,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명나라|명]]의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성에 찬탄(讚嘆)하여 특별히 출간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대북]]이 집권하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연장에 들었다.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參議)가 되고 [[명나라|명]]에서 국왕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명나라|명]]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파일:Honggildongjeon.jpg|thumb섬네일|left왼쪽|180px|[[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홍길동전 첫 쪽]]
 
그러나 귀국 후 [[1610년]] [[2월]] [[명나라|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해 4월 [[부호군]]에 제수된 뒤 [[명나라|명]]에 다시 갈 [[천추사]]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여러 번 상소를 올려 거절했다. 이 일로 탄핵당하고 부호군직에서 파직되었다. 이어 [[사헌부]]에서 여러 번 그를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이 이를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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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10월]]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의 한 사람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에서 탄핵당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았으나 [[11월]] 내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수십 차례 탄핵받고 42일간 의금부에 갇혀 지내다가 그해 [[12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咸悅)로 유배됐는데 이때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1610년]](광해군 2년)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에 유배됐고 유배지에 간 뒤에도 양사(兩司)를 비롯해서 재야 각처에서 그의 [[위리안치]](圍籬安置) 등을 원하는 탄핵과 비난이 계속되었으나 그가 [[북인]] 당원인 탓에 무사하였다. 배소에서 그는 학동들을 데려다 가르치는 한편 글을 써서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성소부부고』는 당대의 용사, 충신, 명사들에 대한 인물평이 담겨 있고 『[[홍길동전]]』은 [[조선]] 초 실존한 인물인 도적 [[홍길동]]을 동기(動機)로 하여 이상향(理想鄕)을 표현하였다.
 
허균은 당시 『[[홍길동전]]』의 저자를 밝히지 않았으나 [[북인]]계 인사 [[유몽인]]이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라고 외부에 알리면서 그의 작품인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10년 5월에는 [[명나라|명]](明)의 [[주지번]]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화제가 되어 조정에 들기도 했다. 1612년 『[[홍길동전]]』을 완성한 뒤 바로 석방되었으며, 그 뒤 몇 년간은 [[정읍시|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1612년]] [[12월]] 진주사(陳奏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명]](明)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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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사헌부]]와 [[사간원]]은 계속 허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8월 21일]] [[사헌부]]의 탄핵 상소가 올려진 뒤 바로 파면당했다.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ref name="han11"/> 그는 도피하라는 지인들의 권고를 거절하고 자신의 저서와 작품들, 누나 [[허난설헌]]의 시문들을 모두 손수 장녀의 집에 옮겼다. 그는 사위 이사성(李士星)에게 나중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간행하도록 할 것을 부탁했고, 당시 어린 외손자인 [[이필진]]에게도 나중에 자신의 문집을 꼭 간행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해 [[8월 16일]]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뒤 국문을 받고 [[8월 24일]] [[한성부]]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시집간 두 딸은 연좌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그러나 다른 아들들은 하인들의 도움으로 [[조령]] 근처로 숨었다가 [[경상북도]] [[영천]]과 [[울산]]에 숨어 살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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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의 사후 [[연좌제]]가 적용되어 강릉에 있는 아버지 [[허엽]]의 묘소도 [[부관참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오는 날이면 허균의 선영에는 울부짖음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위령제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허균 사후 그의 후손들은 끊긴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그의 후손들 중 일부는 파가 다른 타 문중(허목 봉례공파)에 양자로 가거나 타인의 후손인 것처럼 변성명을 하고 후손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허균의 살아남은 아들(허굉)의 직계 자손들이 가첩을 통해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여 오다가, 1995년 양천허씨 허추자산공파 세보에 판도좌랑공 11세손(균)파 교산공파로 숨겨진 혈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인 [[홍길동전]]은 [[인조 반정]] 직전 유몽인 등이 자신들의 문집과 서신 등에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홍길동전의 저자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의 문집과 성소부부고 등은 [[1668년]] 외손자 [[이필진]]이 간행하여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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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파일:Kim Seokju.PNG|thumb섬네일|left왼쪽|160px|[[김석주]]]]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조선 숙종|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대한제국이 망하던 시점까지 복권되지 않고,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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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평론 ===
[[파일:Korea-Domun.daejak-01.jpg|thumb섬네일|150px|[[도문대작]]의 일부]]
허균은 한국 최초의 음식 평론서도 남겼다. 그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에 관한 내용으로 꾸며진다.<ref name="ddd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11/2008091101133.html '홍길동' 쓴 허균은 음식 평론가였다] 조선일보 2008년 9월 12일자</ref> 이 책에는 허균이 40 평생 먹어본 조선 최고의 맛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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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와 작품 ==
=== 저서 ===
[[파일:Honggildongjeon.jpg|thumb섬네일|200px|[[홍길동전]]]]
{{위키자료집|글쓴이:허균}}
*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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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서 ===
* 《고시선 古詩選》
* 《사체성당 四體盛唐》
* 《당시선 唐詩選》
* 《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
* 《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
 
===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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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선의 불교 신자]]
[[분류:신화창조 작가]]
[[분류:한국의 판타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