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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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1685–1703) ===
[[파일:Johann Ambrosius Bach.jpg|thumb|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 바흐의 아버지]]
[[1685년]] 거리의 악사(바이올린 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1695)의 막내아들로서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3월 23일]]에 그 곳의 성(聖)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크의오르돌프 가인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nowiki/>org(Georg Bhm, Bh1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inkenAdams Reinken, 1621623-1722)을 [[바이마르 궁정|이마르 궁정]][[디트리히 북스테후데|리히 북스테후데]][[뮐하우젠|뮐하젠]][[교회 칸타타]] 작곡 힘을 여 번 의 을 작곡 파 통와 분쟁에 말려들어 겨우 1년 만에알게 되어 곳을 떠나게영향을 되었다받았다.
 
=== 아른슈타트 시대(1703-1707) ===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자활할 필요에 쫓겨,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시타트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북독일의 뤼베크를 찾아가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이 시기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아른시타트 시대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인데, 그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여,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독일의 도시 [[뮐하우젠]]으로 갔다.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교회 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들여 제71번,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말려들어 겨우 1년 만에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 바이마르 시대(1708-1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