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오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3번째 줄:
* 오자치(吳自治) : 시조 오언의 현손.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에 책록되었고, 이후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가 노부(老父)의 봉양을 이유로 은퇴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 오겸(吳謙, [[1496년]] ~ [[1582년]]) : 오자치의 손자. 자는 경부(敬夫),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532년]](중종 27)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1546년]](명종 원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지고, 호조참판, 예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1571년]](선조 4) 좌찬성(左贊成)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 오희길(吳希吉, [[1556년]]~[[1625년]]) : 오겸의 동생 오원의 손자.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鞱庵). 아버지는 오언기(吳彦麒)이다. 금강 기효간(奇孝諫)·정여립(鄭汝立)의 문인이다. [[1589년]] 천거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가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 경기전 참봉으로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봉안, 보존하여 다른 사고의 실록은 없어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실록을 있게한 공로가 있었다. 임란 이후 폐정의 쇄신과 인심 수습책을 상소했으며,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다. 고창 월계정사에 제향되었다.
* 오희도(吳希道, [[1583년]] ~ [[1623년]]) : 오겸의 동생 오원(吳謜)의 손자. 자는 득원(得原). 아버지는 오언표이며, 오희길과 사촌간이다. [[1623년]](인조 원년)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해 관직이 검열(檢閱)에 이르렀으나, 같은 해 두창(痘瘡)으로 객사했다.
* 오이익(吳以翼, [[1618년]] ~ [[1666년]]) : 오희도의 3남. 자는 자서(子敍). [[1652년]](효종 3)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겸 지제교를 지냈고, 함평현감(咸平縣監)에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무고로 유배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