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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도중 [[당 태종]]이 도첩(度牒)을 하사하고 [[원법사]](元法寺)에 있게 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비담론(毘曇論)》, 《성실론(成實論)》, 《구사론(俱舍論)》 등을 읽었고, 역경(譯經, 경전을 번역하는 일)과 저술 등에 종사하여 중국의 [[불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원측은 유식(唯識)학자였으며 후에 [[서명사]]에서 대덕(大德)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 [[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zh:地婆诃罗|地婆訶羅]], 日照))가 인도에서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과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등의 [[불경]]을 가지고 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을 도울 대덕 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증의(證義)로서 참여했다. [[693년]]에는 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보우경]](寶雨經)》을 번역했다.
 
[[695년]]에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ja:ホータン王国|우전국]](于闐)에서 가져온 《[[화엄경]]》을 새로 번역할 때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사리를 [[룽먼 산 (허난 성)|룽먼 산]]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했고, 그 뒤 제자인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