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다후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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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헤이 13년/[[엔분]](延文) 3년([[1358년]]) 다카우지가 서거하고, 남조 세력도 막부의 거듭되는 공세 앞에 힘을 잃어갔으며 쇼헤이 18년/[[조지 (1362년)|조지]](貞治) 2년([[1363년]])에는 오우치 히로요、야마나 토키우지 등도 막부에 항복해 다다후유 세력은 와해되었다. 간노의 소란을 계기로 시작된 다카우지 ・ 다다요시-다다후유 양대 파벌에 의한 무로마치 막부의 내분극은 막을 내렸다. 쇼헤이 21년/조지 6년([[1366년]])의 서장을 끝으로 다다후유의 공식적인 활동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일설에는 요시아키라의 사후 뒤를 이어 3대 쇼군이 된 조카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와 화해하고 요시미쓰로부터 이와미 땅에 숨어사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알려졌다. 요시미쓰가 다다후유의 신병을 보호하고 있었다고도 여겨진다. 다다후유는 아버지 다카우지나 이복동생인 요시아키라보다 오래 살았고, 요시미츠 시대 중반까지 생존했지만 그 시기의 그에 대해 적은 문서는 존재하지 않고,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어떠한 만년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f>세노 세이이치로(瀬野精一郎) 저『인물총서 ‐ 아시카가 다다후유』(人物叢書‐足利直冬), 깃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같은 2005년, p.178</ref>
 
다다후유가 사망한 해는 군서유종(群書類従)에 실린 『아시카가 계도(足利系図)』나 『남산순수록(南山巡狩録)』은 엔추 4년/지토쿠(至徳) 4년 7월 2일([[1387년]] 8월 16일)로 되어 있고, 강목체 사서인 『사료종람(史料綜覧)』권7에는 「북조(北朝)의 궁내대보(宮内大輔) 종4위하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졸하였다」(北朝宮内大輔従四位下足利直冬卒ス)라는 강(綱)을 이 설에 따라 기재하고 있다. 『국사실록(国史実録)』이나 『가마쿠라 대일기(鎌倉大日記)』 등에서는 [[겐추]](元中) 5년/[[가쿄]](嘉慶) 2년 7월 3일([[1388년]] 8월 5일)에 이와미에서 사망하였다고, 『계도찬요(系図纂要)』에 실린 「아시카가 쇼군가 계도(足利将軍家系図)」나 「역대진서요략(歴代鎮西要略)」 등에는 [[오에이]](応永) 7년 3월 11일([[1400년]] 4월 5일)에 이와미에서 서거하였다고 적고 있다.
 
다다후유의 사망을 언급한 기록에서 공통으로 언급된 점은 다다후유가 사망했을 때 나이가 일흔네 살이었다는 것이다. 원중 4년이나 5년(1388)의 경우는 다다후유가 태어났을 때 다카우지가 10세나 11세 때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데다 다다후유의 아들로써 승려로 출가하는 호잔 켄친(宝山乾珍)이 오에이 원년(1394년)에 태어났으므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에이 7년에 사망하였다고 하면 태어난 해는 가레키(嘉暦) 2년인데 요시아키라보다 연상이고 켄친도 다다후유의 나이 예순여덟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라고 보아 앞뒤가 맞기 때문에, 이 몰년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ref>세노 세이이치로, 같은 책, 2005년, p.179~180.</ref>
 
== 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