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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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열강은 독일의 군사 능력을 심각한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독일 국방군]]보다 우세했지만 대규모의 재무장을 하고 있는 독일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하여 유럽 열강과 전쟁을 했을 때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자고 설득하였다.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비되지 않았고, 독일의 급성장에 대해 우려하였다. 독일 군부도 독일군의 실상을 알고 있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이용했다.
 
영국의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은 9월 15일부터 9월 16일까지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히틀러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추가적 논의 없이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영국은 내각과 프랑스에 수데텐란트 주민들의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9월 22일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Georges Bonnet)는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주데텐란트의 인구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기로 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 마지못해 수용하기로 했다. 이 제안은 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Godesberg)에서 히틀러를 만났을 때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합병되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수데텐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했지만, 영국 내각, 프랑스 정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체임벌린의 제안을 거부했다.
 
9월 23일, 새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얀 시로비]]는 총동원령을 내렸고<ref>[http://www.nizkor.org/hweb/imt/tgmwc/tgmwc-15/tgmwc-15-146-09.shtml Records of the Nuremberg trials]</ref>, 1백만 명 이상에 달하는 완전히 무장된 군인들이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적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전쟁을 피하려는 체임벌린의 생각에 따라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와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