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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는데,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625년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628년(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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