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계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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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시신은 [[경기도]] [[안산군]] [[군내면]] 동막동(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사좌(巳坐)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그의 초장지 근처인 [[안산군]] [[군내면]] 장상리(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67번지산67번지)에는 그의 양자 [[완평군]] [[이승응]]과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었다. 그의 묘는 다시 [[경기도]] [[과천군]] [[군포시|북면]] [[군포동|당정리]](현,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동북쪽 [[은전군]]묘 근처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 [[소의대부]]에 추증되고, 그의 부인인 광산김씨는 광산현부인(光山縣夫人)에 봉작되었다. [[1851년]](철종 2) [[7월 14일]] 자녀 없이 죽은 그의 이복삼촌 [[은전군]]의 봉사손을 정하라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뜻에 따라, 철종은 은전군의 사후양자 후보를 찾다가, 풍계군을 다시 은전군의 양자로 지정했다. [[1851년]] 다시 [[조선 철종|철종]]의 명으로 풍계군을 은전군의 양자로 들이고, [[조선 선조|선조]]의 9남 [[경창군]]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인 [[이승응]]을 다시 풍계군의 양자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