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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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왕족이 사망했을 때 하사되는 예장 등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은언군의 묘 아래인 해좌원에 예장하였다가 다시 [[강화군]]으로 이장되었으며, [[선원보략]]에 의하면 이후 또다시 [[여주]](廳州)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후에 다시 [[1856년]](철종 7년) [[3월 26일]]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 선단리(현, [[포천시]] [[선단동]]) 산11-13번지 [[해룡산]] 임좌에 이장하였다. 이때 본부인 [[완양부대부인]]의 묘소도 이장하여 합장하였고, 새로 이장된 묘소 동쪽 100m 지점에는 장남 이원경의[[이원경 (1827년)|이원경]]의 묘소도 이장되어 왔다. 현재 묘역과 [[신도비]]는 [[1986년]] [[4월]] 이후 [[포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1849년]] [[조선 헌종|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그의 셋째 아들 원범이 [[순원왕후]]에 의해 낙점되어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 철종|철종]]으로 등극하였다. 이때 그는 작위가 없어서 [[1849년]] [[6월 17일]] 먼저 [[의정부]][[좌의정]] [[김도희]](金道喜) 등의 건의로 [[상계군]], 풍계군의 계자 돌림을 고려하고, [[충청남도]] [[전의]]의 지역명에서 따서 전계군(全溪君)에 피봉되었다가, 축호와 사식을 [[송나라]] [[조윤양|복황]](濮皇)과 [[수왕]](秀王) 및 본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조선 원종|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의 전례에 따라 다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으로 추봉하고, 묘(墓)도 다시 정비하고, 묘 앞에 [[신도비]]를 세우게 하고, [[전계궁|가묘]](家廟, 전계궁)를 중건하여 신주는 [[불천지위]]로 정하고 [[영평군 (1828년)|영평군]]과 그 후손으로 봉사<ref>제사를 받듦</ref>하게 하였다. 한편 숙종 때의 왕족 중에도 같은 작호인 전계군(全溪君)의 작위를 받은 이박(李溥)이라는 왕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