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7번째 줄:
 
=== 유배와 최후 ===
그는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恩彥君)과 함께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또한 그의 외조부 임지번은[[임지번]]은 [[제주도]] [[대정현]]의 [[병역|군역]]에 충군되었다충군(充軍)되었다. 그러나 은신군과 그의 형 [[은언군]]이 유배당한 뒤에도, 그는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죄목이 더해져 계속 탄핵당하였다. 당시 [[노론]] [[벽파]] 일각에서는 [[조선 정조|세손]]을 사전에 제거하려 했고, [[조선 영조|영조]]는 이를 알아보고 [[홍봉한]]이 은신군과 [[은언군]] 형제의 빚을 갚아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형 [[은언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그는 [[풍토병]]에 걸렸고, 유배 2년만인 [[1771년]] [[음력 3월 29일]]에 병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시신은 도성으로 운구되었다가, 그해 [[6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이패리(현 [[남양주시]] 이패동) 계암(鷄岩) 해질머루부락 서쪽 손좌(巽坐)에 모친 [[숙빈 임씨|양제 임씨]]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774년]](영조 50) [[5월 12일]] 특명으로 복직되었고, 형 [[은언군]] 인도 복권되었다. 그의 모친 [[숙빈 임씨|양제 임씨]]는 정조 즉위 후 [[1776년]](정조 즉위) [[8월 3일]]에 [[양제]]로 복작되었다. 정조 즉위 후 그는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복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