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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사후 복권되었다. 시신은 바로 [[제주도]]에 안장되었다가 운구되어 선혜청(宣惠廳)에 의해 도성 근처에 매장되었으며, [[1779년]] [[11월 5일]] 묘지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정조에 의해 다시 장지를 간택하여 [[양주군]] [[금촌]](楊州郡金村) 이패리(二牌里, 현 [[남양주시]] [[이패동]] 해질모루부락 서쪽) 계암(鷄巖) 손향(巽向), [[숙빈 임씨]]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의 묘소는 후일 실전되었다. 은신군의 묘소가 설치되면서 [[남양주시|미금면]] 이패리 중 은신군의 묘소가 있던 지역을 왕자궁(王子宮) 부락이라 부르게 되었다. 은신군은 후에 다시 [[양주군]] [[화도면]](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개장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은신군과 군부인 남양홍씨의 시신은 화장되어 [[흥선대원군]] 묘소 근처의 납골묘에 안치되었으며, 신도비와 비석, 석물들은 [[2005년]] [[1월]] 양부 [[낙천군]], 양증손 [[흥친왕]] 등의 묘비와 함께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의 저택 재산으로 내려진 은신군방은 [[경기도]] [[풍덕]](豊德)에 있었다. 부인 남양군부인 남양홍씨는 [[1815년]] 양자 [[남연군]]의 입양을 본 후, [[1829년]]에 사망하였다. 풍덕에 있던 은신군방 외에 은신군이 연령군의 계후를 이으면서 연령군방(延齡君房)의 재산도 군부인 홍씨에게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