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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량'''(元俊良, ? - ?)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으로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 원연, 원용의 아버지이자 [[원사웅]]의 조부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수경상좌병사(守慶尙左兵使)에 이르렀고, 사후 아들 [[원균]]의 [[임진왜란]] 당시 훈공으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원주 원씨|원주]]이다. [[경기도]] [[평택군|진위]]현 출신.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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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에 급제하여 [[1544년]](중종 39) [[선전관]]이 되고, 이후 [[춘추관]][[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절충장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었다. [[1555년]](명종 10) 달량포에 침입한 왜군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1557년(명종 12)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림파]]의 비판을 받고 사퇴, 낙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1562년]] 6월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뒤에 [[사헌부]]의 반발로 체직당하였다. 이후 [[사림파]]와 갈등하다가 [[1563년]](명종 18)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길주목사에 이르러 [[1566년]] [[12월]]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