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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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성을 차지한 정문부가 드디어 함경도의 각 고을에 전하자 군사 3천여 명이 모였고, 길주에서도 허진(許珍)ㆍ김국신(金國信)ㆍ허대성(許大成)도 군사를 모아 호응하였다. 《기재사초》는 처음 산골로 도망쳤던피난했던 정문부가 6, 7명의 수령과 협의해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함경도에서의 의견은 호응하는 쪽과 호응하지 않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보내온 방문(榜文)의 내용에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적을 치고, 천병(天兵) 10만이 조만간 평양에 도착할 것인데, 반은 설한령(薛罕嶺)을 넘었다"는 말이 실려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했다고 한다.
 
11월에 정문부는 적을 가파(加坡)에서 만나 장차 싸우려고 모든 장수에게 부서(部署)를 정해 주었다. 정현룡은 중위장을 시켜 백탑(白塔)에 주둔하게 하고, 오응태와 원충서(元忠恕)는 복병장을 시켜 석성(石城)과 모회(毛會)에 나누어 주둔케 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시켜 목책에 주둔케 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을 시켜 날하(河)에 주둔케 하고, 김국신ㆍ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시켜 임명(臨溟)과 방치(方峙)에 나누어 주둔케 하였다. 『북관대첩비』는 "적이 승리에 익숙하여 심각하게 방비도 하지 않았으므로 기습하여 쳐부쉈다."고 이때의 싸움을 전하고 있으며,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응원해 와서 마침내 7천여 명의 군사가 모였다고 한다. 또한 성진(城津)에 있는 적이 임명에 와서 크게 노략질하자 경기병을 이끌고 습격했고, 비산(萆山)에 복병을 두어 적이 돌아오는 것을 살펴서 협공하여 쳐부수었으며, 이때 전사한 왜병 수백의 시신을 배를 갈라서 창자를 큰 길에 펼쳐 놓았다고 한다. 12월에는 길주의 쌍포진(雙浦津)에서, 이듬해 정월에 다시 단천에서 싸워 모두 이겼다. 정문부는 돌아가는 왜병을 추격해 백탑 남쪽 옻나무 밑까지 갔으나, 이붕수와 허대성ㆍ이희당(李希唐) 등이 전사하기도 했다. 이로써 왜병들은 함경도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고, 정문부 장군 명성만 들어도 도망했다 한다.
 
[[파일:북관대첩비.jpg|thumb|[[북관대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