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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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그 전날, [[사천 해전]]을 치른 함대는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전투 당일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합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함대 지휘관은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였다.
 
이 전투는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앞세운 전투다. 특히 기함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중위장 [[권준 (1541년)|권준]](權俊)이 가메이 고레노리으로 추정되는 왜장을일본군 장수를 화살로 명중시켜 바다로 떨어뜨리자, 첨사(僉使) [[김완 (1577년)|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목을 베었고, 왜군은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다. 하지만, 일본의 기록에서는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는 생환해생환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권준 (1541년)|권준]]의 화살 맞고 죽은 적장은 [[구루시마 미치유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준 금부채가 전리품으로 노획되었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사살된 왜군만도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