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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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글}},
{{과학자 정보
|이름 = 앙투안 라부아지에
|그림 = Antoine lavoisier color.jpg
|그림 크기 = 230px
|그림 설명 =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태어난 날 = 1743년 8월 26일
|태어난 곳 = [[프랑스]] [[파리 (도시)|파리]]
|영문명 =
|죽은 날 = {{사망일과 나이|1794|5|8|1743|8|26}}
|죽은 곳 = [[프랑스]] [[파리 (도시)|파리]] [[콩코르드 광장]]
|거주지 =
|국적 = [[프랑스]]
|분야 = [[화학]]
|소속 = 세금 징수 조합<br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출신 대학 =
|지도교수 =
|지도학생 =
|주요 업적 = 플로지스톤설 부정<br />질량 보존의 법칙 확립<br />원소와 화합물 구분<br />산소 명명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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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
}}
{{포털|화학}}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llang|fr|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년]] [[8월 26일]] ~ [[1794년]] [[5월 8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대한민국에서는 짧게 줄여 '라부아지에'라고도 표기한다. 그는 뛰어난 실험자였으며, 화학 이외의 다른 방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공직에 있기도 하였다. [[연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면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산화]] 과정에서 [[산소]]의 작용, 산화나 [[호흡]] 간의 [[정량적]]인 유사점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 반응]]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을 확립하였으며 [[화학 원소|원소]]와 [[화합물]]을 구분하여 근대 화합물 명명법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화학에 정량적인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f name="2007britannica">ed. by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Lavoisier",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Vol.22, 15th editio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nica, 2007, pp.841~842.</ref>
 
== 초년 (1743~1775) ==
=== 유년 및 청년기 ===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ref>''Ibid.'', p.32~33.</ref>
 
==== 연소 연구 ====
[[1772년]] [[11월 1일]]에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할 경우 [[공기 (기체)|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할 경우 공기를 잃으며 [[금속]]이 생성되고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그는 공기 중 어느 성분이 이러한 현상과 관련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ref>''Ibid.'', p.66.</ref> 그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와 화학 소론》(''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이라는 책으로 [[1774년]]에 출판하였다.
 
[[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하였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 시|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탈플로지스톤 공기”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ref>''Ibid.'', pp.74~76.</ref>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1774년]] [[9월 30일]] 편지로 보냈으나, 정작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일부 과학사 학자, 특히 스웨덴의 과학사 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셸레의 편지를 무시한 일이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ef>''Ibid.'', pp.77~78.</ref>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ref>유지영, 〈프리스틀리와 라봐지에〉, 《한국과학사학회지》, 서울: 한국과학사학회, Vol.12 No.1, 1990, 159쪽.</ref>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이산화 탄소]]가 생성된다는 사실은 이전의 실험을 통해서 알려졌다. [[1775년]] 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적인 실험을 통해서 이때 발생하는 기체가 [[이산화 탄소]]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계속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회를 [[숯]]을 사용하지 않고 가열하면 [[금속]] 형태의 수은과 대기 중의 [[공기 (기체)|공기]]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는 기체가 생성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서 가열할 경우 금속회가 포함하고 있던 기체와 [[숯]]이 반응하여 [[이산화 탄소]]가 발생하고, 따라서 [[금속]]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가 일반 공기와 성질이 유사하나 더 오랫동안 촛불을 태울 수 있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체에서 [[산소]]를 추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1775년]] [[3월 24일]]에 발표하였다. [[4월 26일]]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의 결과를 토대로 금속회를 가열할 경우의 질량 변화는 공기의 출입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공기는 대기 중의 공기보다 더 순수하다고 설명하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79~80.</ref> 이 실험의 결과와 산소의 발견은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연소]]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이후 라부아지에가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ref>Donovan, A.,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Cambrid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137.</ref>
 
=== 세금 징수원 ===
[[파일:Anne Robert Jacques Turgot.jpg|thumb|right|220px|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1768년]]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 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담배 생산과 판매를 관장하는 담배 위원회의 지역 감찰관이 되었다. 그의 상관은 세금 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기도 한 자크 폴즈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23~24.</ref> 라부아지에는 주로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받았다. 당시 담배는 많은 양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밀수되곤 하였으며, 소매상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서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하곤 하였다.<ref>''Ibid.'', p.25.</ref> 라부아지에는 당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1771년]] [[12월 4일]] 자크 폴즈의 외동딸인 [[마리 앤 피에레테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는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1772년]]에 라부아지에의 아버지인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의 칭호를 매수해주었다. 이는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관습이었다.<ref name="2007britannica"/>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었다.<ref>''Ibid.'', p.85.</ref> 그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 징수 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ref>''Ibid.'', p.87.</ref>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튀르고의 자유주의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많이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담배·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 시|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ref>''Ibid.'', p.88.</ref>
 
== 활동기 (1775~1789) ==
핵새핵 9핵에새엑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ref>''Ibid.'', pp.201~205.</ref>
[[파일:David -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jpg|thumb|right|220px|〈라부아지에와 그의 부인〉, 자크 루이 다비드, 1788.]]
=== 과학적 활동 ===
==== 새로운 연소 이론 ====
===== 산소 연구 =====
[[1775년]] [[5월 26일]] 라부아지에는 [[공기 (기체)|공기]]의 성분 중 특정 성분이 생물의 호흡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의 공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실 이 공기는 [[산소]]로, [[칼 빌헬름 셸레|셸레]]와 [[조지프 프리스틀리|프리스틀리]]에 의해서 이미 발견되어있었다.) [[1777년]]에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에서 라부아지에는 모든 [[산 (화학)|산]]은 공기 내의 특정 성분에 의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principe oxygine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그리스어]]로 '산을 생성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산소의 어원이 되었다. (principe oxygine 역시 산소와 같은 물질이나 라부아지에는 처음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설탕]]과 principe oxygine이 반응하면 [[옥살산]]이 생성되는 등 여러 물질과 반응하여 산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이론은 [[염화 수소]] 등 산소를 포함하지 않은 산에 관해서는 들어맞지 않으나, [[산소산]]을 설명하기 적합하다.<ref>''Ibid.'', p.106.</ref>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자신의 발견과 이전의 [[연소]]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생명의 공기'는 principe oxygine과 연소 현상에 관계되는 화소(火素)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세 가지 기체는 모두 [[산소]]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그는 [[1777년]] [[11월 12일]]에 제출된 논문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연소를 ‘물체가 불에 타기 때문에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고, 물체가 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 플로지스톤설은 순환논법에 불과하고, 결국 플로지스톤설은 가설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ref>''Ibid.'', pp.107~108.</ref>
 
===== 물의 조성 =====
[[1783년]] [[6월 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년]] [[6월 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했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년]] [[1월 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ref>''Ibid.'', pp.143~144.</ref>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과학자 30명 이상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화학 원소|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ref>''Ibid.'', pp.150~151.</ref>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 되었다.
 
===== 새로운 이론의 제시 =====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 [[플로지스톤설]]에 대비되는 많은 연구 자료가 축적되어 갔으나, 여전히 많은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1785년]]에 제출한 논문인 ''Les Réfelxtions des le phlogistique''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정확히 규명되어있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는 이론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연소]]가 일어날 때 '생명의 공기'를 이루고 있는 principe oxygine과 화소(火素) 중 화소가 물체와 결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플로지스톤설과 그의 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소]]와 관련된 물질의 이동방향이다. 플로지스톤설에서는 연소가 일어나면서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에서 빠져나간다고 보았고,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련된 물질이 물체와 결합한다고 본 것이다.<ref>''Ibid.'', pp.176~177.</ref> 현대의 [[연소]] 이론과 이를 비교해 보면, 라부아지에가 생각하였던 '생명의 공기', principe oxygine, 그리고 화소는 모두 [[산소]]이다. 그러나 연소반응에서 산소의 변화는 라부아지에가 생각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을 대변하는 다른 과학자들에게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론을 비판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아일랜드]]의 [[리처드 커원]]에 의해서 [[1787년]] 출판된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nstitution of Acids''이 있다. 커완은 이 책에서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이며,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는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주장하였다.<ref>''Ibid.'', p.178.</ref> 라부아지에와 기통 드 모르보 등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커완의 주장에 관해서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물체에 [[플로지스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으며, 수소 역시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통해서 물체를 연소시킬 때 일어나는 질량의 변화를 손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체에 수소가 포함되어있다고 하여도 이것이 연소하기 위해서는 결국 [[산소]]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ref>''Ibid.'', pp.181~182.</ref> 이러한 논쟁을 거쳐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많은 과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ref name="1911britannica"/>
 
한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널리 알릴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789년]] [[1월 17일]] 《[[화학 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공기 (기체)|공기]]와 [[물]]의 조성, [[연소]]와 [[산 (화학)|산]]에서의 [[산소]]의 역할, [[열]]과 [[호흡]], [[발효]]에 관한 이론 등을 저술하였다. 제2부에서는 산, [[염기]] 등의 목록과 [[화합물]], [[화학 원소]] 등의 목록을 저술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화학 물질]] 목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제3부에서는 실험에 관해서 저술하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192~193.</ref>
 
===== 평가 =====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 이론은 단순히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하였다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산소]]와 연관된 여러 가지 반응에 적용되었으며 [[호흡]]·[[발효]]·[[부패]]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도입되었다. 또한,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수많은 새로운 [[산 (화학)|산]]·[[염기]]·[[염]]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화합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곧 화학적 명명법 정리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화학 원소|원소]]의 개념 역시 확장되어 재정립되었다. 이러한 체계의 확립은 근대 화학의 기초를 이루었으며, 이를 [[화학 혁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ref>조정미, 〈산소는 누가 발견하였는가〉, 《基礎科學硏究誌》, Vol.15,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 1996, p.78.</ref>
 
==== 화학적 명명법 ====
이전에는 화합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기준이 제각각이라, 이름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부아지에·[[클로드 루이 베르톨레]]·[[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등이 주축이 되어 화학적 명명법을 개정하였고, 이를 [[1787년]]에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ref>Poirier, J. P., ''op. cit.'', pp.182~183.</ref> 이들은 화학 물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이름은 그 물질의 성질을 잘 드러내며, 이름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근간을 둔다는 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화학 물질들을 새롭게 명명하였다.<ref>''Ibid.'', p.184.</ref> 이후 [[마르틴 하인리히 클라프로트]]를 주축으로 한 [[독일]]의 화학자, 그리고 자신의 관측을 더 중시했던 [[헨리 캐번디시]]와 예전의 이론에 집착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의 화학자도 [[프랑스]] 화학자의 움직임에 동참하였다.<ref name="1911britannica">ed.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LAVOISIER, ANTOINE LAURENT"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Vol.16, 11th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0~1911, pp.295~296</ref>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독일·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화학적 명명법 개정은 통일된 화학적 언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를 두고 있다.<ref>''Ibid.'', p.190.</ref>
 
==== 열 연구 ====
[[파일:Ice-calorimeter.jpg|right|thumb|220px|1789년 출판된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에 실린 얼음 열량계의 그림]]
라부아지에는 [[1782년]]경부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의 협력하에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는 열에 따른 물질의 팽창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하기도 하고, [[조지프 블랙]]의 얼음 열량계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또한, 두 사람은 어떤 물질이 상태 변화를 일으킬 때 출입하는 열은 상태 변화를 역으로 진행할 경우 열 출입 역시 반대로 되고 그 양은 같다는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제시하였다.<ref name="P137">''Ibid.'', p.137.</ref> [[1783년]]에 라플라스와 함께 제출한 논문인 ''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라부아지에는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는 물질 입자가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영향을 끼치는 열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체]]를 [[온도]]와 [[압력]]을 조절함으로써 [[액체]] 또는 [[고체]]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ref>Donovan, A., ''op. cit.'', p.133.</ref>
 
==== 생물학 연구 ====
라부아지에는 [[발효]]와 [[호흡]]에 관해서도 연구하였고, 이에 관련된 화학적 과정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5년]] [[10월 13일]]의 실험을 통해서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수록 동물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는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ref>Poirier, J. P., ''op. cit.'', p.103~104.</ref> 그는 [[1783년]] [[6월 28일]] 제출한 열(熱)에 관한 논문인 〈열에 관한 보고서〉(''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생체 내에서 발생하는 열에 관해서도 언급하였는데, 생명체가 들이마신 [[산소]]는 일종의 느린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소 반응이 [[허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고, 발생한 열은 [[혈액]]을 통해서 몸 전체로 공급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P137"/> 실제로 체내에서 일어나는 [[소화 (생물학)|소화]]는 연소 반응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라부아지에는 반응이 일어나는 위치를 잘못 파악하였다. 반응은 [[허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온몸에 존재하는 [[세포]]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체내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고, [[물질대사|물질 대사]]를 통해서 생명체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기초적인 인식은 옳았다.<ref>''Ibid.'', p.139.</ref>
 
=== 공직에서의 활동 ===
==== 튀르고와 네케르 ====
[[파일:Jacques Necker.jpg|thumb|right|220px|자크 네케르]]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능력과 과학적·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ref>''Ibid.'', p.92.</ref> 그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 앤 피에레테 폴즈|마리 앤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ref>''Ibid.'', pp.94~96.</ref>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가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튀르고]]가 해임하고<ref>''Ibid.'', p.100.</ref>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ref>''Ibid.'', pp.117~119.</ref> [[1778년]]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샀다. 그는 자기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ref>''Ibid.'', pp.121~122.</ref>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ref>''Ibid.'', p.127.</ref>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져 [[센 강]]의 수질에 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하였다.<ref>''Ibid.'', p.134.</ref>
 
==== 고위공직자 생활 ====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 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ref>''Ibid.'', pp.154~159.</ref>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ref>''Ibid.'', pp.160~161.</ref>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 시|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ref>''Ibid.'', pp.171~172.</ref>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자크 네케르|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기사를 《프랑스 신보》(''Gazette de France'')를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ref>''Ibid.'', pp.199~200.</ref>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씨를 분배해 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 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 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ref>''Ibid.'', pp.201~205.</ref>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시|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llang|fr|vingtième}})<ref>1/20세(소득의 5%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것)</ref>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llang|fr|taille}})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ref>''Ibid.'', pp.207~208.</ref>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ref>''Ibid.'', p.209.</ref>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ref>''Ibid.'', pp.210~21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