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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1743~1775): 새핵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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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기 (1775~1789) ==
핵새핵 9핵에새엑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ref>''Ibid.'', pp.201~205.</ref>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시|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llang|fr|vingtième}})<ref>1/20세(소득의 5%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것)</ref>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llang|fr|taille}})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ref>''Ibid.'', pp.207~208.</ref>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ref>''Ibid.'', p.209.</ref>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ref>''Ibid.'', pp.210~21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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