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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赫居世 居西干 三十八年春二月 (기원전 20년 02월 (음))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辰韓)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01_0020_0140&types=o|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2018-04-06}}</ref>로 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중국인들이 마한의 동쪽으로 대거 이주하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꺼려했다는 내용이다.
* 北史 列傳 新羅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북사》의 기록에는 新羅(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진한)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고구려)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辰韓(진한)을 秦韓(진한)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진)나라 때 流亡人(유망인)들이 役(노역)을 피하여 [馬韓(마한)으로] 가자, 馬韓(마한)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진)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진한)이라 하였다고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徒라고 하여 馬韓(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辰韓亦曰秦韓. 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 馬韓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 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12_0010_0030_0010|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2018-04-06}}</ref>로 되어 있는데, 요약하자면, 신라의 선조인 진한은 중국 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로서 마한과 언어가 달랐으며 중국사람과 언어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 중국정사조선전 > 北史 > 列傳 > 新羅 > 《북사》의 기록에는 해석상 논란이 되는 구절이 있는데, (○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jsessionid=5C9AEA154182B5B1993F28ACD63A1FE2?levelId=jo_012r_0010_0030_0020|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 비교보기 >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확인날짜=2018-04-06}}</ref> 라는 구절이다. 奔(분)의 해석을 달리하여 도망가다로 주장하며 신라의 선조가 고구려인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와 해석을 달리하여 북사의 기록의 주제는 신라에 중국인들이 살게 된 원인에 대한 분석이고 奔의 주된 해석은의미는 힘차게 계속하여 달렸다이므로, 신라의 선조는 고구려인이 아니라 관구검의 예하부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서 해당 구절을, 〈혹은 (신라에 중국인들이 사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를 격파하고 옥저까지 힘차게 계속(繼續)하여 달렸다. 그 후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이(관구검의 예하부대가) 있어 마침내 신라가 되었다. ‘사로’라고도 한다.〉로 해석한다. 참고적으로 갈족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략했을 때 그 예하부대에 갈족, 말갈족이 있었고, 유연을 죽이고 후조를 세운 [[석륵]](石勒)도 갈족이었다<ref>{{저널 인용|제목=여진|url=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97%AC%EC%A7%84&oldid=21037416|날짜=2018-04-01|언어=ko}}</ref>는 주장이 있다.
**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二 《북사》'''新羅'''에 初附庸于百濟 라는 기록<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ko_032_0810_0040|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2018-04-06}}</ref>이 있는데, 신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용되어 있었다는 의미로서 여기서 부용은 속국이라는 의미이다.<ref>{{저널 인용|제목=종속국|url=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A2%85%EC%86%8D%EA%B5%AD&oldid=20349168|날짜=2018-01-01|언어=ko}}</ref>
** 梁書 東夷列傳 新羅 《양서》에 신라는 百濟(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와 沿해 있고, 남북으로는 [高]句驪·百濟(고구려 · 백제)와 접하고 있다.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普通 2년(A.D. 521; 新羅 法興王 8)에 姓(성)은 募(모), 이름은 秦(진)인 [신라]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驪·百濟接.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o&levelId=jo_008_0010_0040_0020&types=o|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2018-04-06}}</ref>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