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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796년]] 프리울리 시노드에서 [[프랑크 왕국]] 아킬레이아의 파울리노 [[총대주교]]는 필리오케의 신경 삽입을 옹호하였고, [[800년]]경에는 전체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필리오케가 삽입된 신경이 암송되기 시작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847년]] 프랑크왕국의 [[수도자]]들에 의해 [[예루살렘]]에 소개되자 동방교회 수도자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이 문제가 [[교황 레오 3세]]에게 알려지자, [[교황]]은 필리오케가필리오케의 교리적신학적 측면에서는문제점보다 문제가교회의 없다고일치 여겼으나문제점으로 반대측과의 마찰을정식으로 피하기라틴어 위하여 신경에 정식으로번역본에 필리오케를 추가하는 것은 보류하고자 하였고, 그는 필리오케가 없는 형태의 신경을 [[코이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각각 작성하여 [[성 베드로]]의 묘에 봉헌된 은제 탁자 2개에 새겨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레오3세의 의도와 달리 필리오케가 삽입된 신경은 미사 중에 계속 불리었고, [[교황 베네딕토 8세]]는 [[1013년]] 필리오케가 삽입된 라틴어 신경을 최종다시 거론하여 승인하기에 이른다.
 
이에 서방교회에게 필리오케를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우스]] 시대 이후로, 필리오케는 [[교황]] 수위권(首位權) 논쟁 등 여타의 신학적 문제와 더불어 동·서방 교회 갈등의 한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