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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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매국노를매국노 를 말한다.
 
당시 대신 중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1858년)|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은 조약 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했던 한규설은 일본의 강압으로 물러가고, 조약에 조인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하영은 초기의 반대 의견을 곧 뒤집은 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박제순보다 더 맹렬한 활약을 하였으나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오적에서는 빠졌다.<ref>전봉관,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6/11/08/200611080500012/200611080500012_1.html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신동아》 (2006년 11월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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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후 숱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나철]]이 을사오적 암살단을 구성한 바 있고, [[기산도]]와 [[전덕기]]도 각각 을사오적 처단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또한 을사오적의 대표격인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독립운동가)|이재명]] 의사에게 칼을 맞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을사오적 모두가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 김동주]]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2006년]] 발표)에서는 [[이완용]]과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이,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2007년]] 발표)에는 [[이지용]]이 수록되어 있다.
 
== 명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