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156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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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朴晉<ref>晋으로도 쓰인다.</ref>, [[1560년]] [[8월 25일]] ~ [[1597년]] [[3월]])은
[[일본군]] 장수 [[사야가]]는 그를 만나 [[조선]]으로 귀순하였다. 사후 [[증직|증]]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으며, 후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양]],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사후 [[증직|증]]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응천군(凝川君)에 추봉되었으며, 후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양]], 자는 명보(明甫) 또는 명부(明夫), 여회(汝晦), 시호는 의열(毅烈)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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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황주(黃州)에서 중국 사신을 전별(餞別)하였으나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병으로 공무를 보지 못하여 군사 훈련 등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ref>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5일(병술) 1번째기사 "대신들이 황정욱의 일과 무과 출신자를 선발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ref>
[[1597년]](선조 30년) [[3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장수 [[누승선]](婁承先)에게 구타당하여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ref name="gu188">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ref> 누승선에게 구타당한 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참고 있다가 사망에 이르렀다.<ref name="gu188"/> 그러나 그를 구타한 [[명나라]] 장수는 처벌받지도 않았고,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죽은 뒤에 그의 시신을 [[윤경립]]이 보자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ref name="gu188"/> [[한준겸]] 역시 뼈가 부러진 것을 목격하였다.<ref name="gu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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