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폰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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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권거래사 ===
사기 행각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위해 [[1920년]] 1월 일명 '증권거래사'를 세웠다. 처음 한 달 동안 18명이 1800불을 맡겼고 한 달 후 신규 투자자들의 투자금에서 빼낸 [[돈]]이 기존 투자자 18명에게 지급됐다. 스쿨 스트리트 나일스 빌딩에 더 큰 사무실을 세웠다. 소문이 퍼져나가고 더 많은 투자자들이 왔다. 불과 [[1920년]] 2월에서 3월 한 달 사이 투자액은 5천 불에서 2만 5천 불로 상승했다([[2017년]]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6만 2천 불에서 30만 9천 불). 폰지는 에이전트를 고용해서 [[뉴잉글랜드]] 지방 및 [[뉴저지 주]]에서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 투자자들은 고액의 [[돈]]을 지급받았고 소문은 더 퍼져갔다. [[1920년]] 5월 투자액이 42만 불([[2017년]]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최대 500만 불)에서 6월에는 250만 불에 이르렀으며([[2017년]]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3000만 불) 7월 말엔 하루에 백 만 불을 모으는 수준이 됐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수익을 보지 못했음에도 계속 [[돈]]을 투자했다. 폰지의 '증권거래사' 지점은 [[메인 주]]에서 [[뉴저지 주]]에까지주에까지 뻗어나갔다.
 
초기의 투자자들은 주로 저소득층이었지만 소문이 퍼져 상류층도 투자를 시작했다. 심지어 [[로렌스 (캔자스 주)|로렌스]]의 은행가가 1만 불을 맡길 정도였으며 존 콜린스같은 폰지의 가까운 친구들이나 처가집 식구들도 투자했다.
 
=== 사기 행각의 취약성 ===
그러는 와중에 폰지는 [[국제반신권]]을 [[돈]]으로 바꾸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1800불을 투자한 처음 18명의 투자자들이 이익을 보려면 [[국제반신권]] 53000장이53,000장이 필요했고 그 후 불어난 15000명의15,000명의 투자자들이 이익을 보려면 [[타이타닉 호]] 정도의 배에 [[국제반신권]]을국제반신권을 가득 채워 [[유럽]]에서 [[미국]]으로 보내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재투자로 인해 배당금은 계속 투자자들에게 지급될 수 있었다.
 
=== 호화로운 일상생활 ===
폰지는 [[렉싱턴 (매사추세츠 주)|렉싱턴]]에 [[별장]]을 사고 최고급 [[차]]를 샀으며 [[뉴잉글랜드]] 지방에 걸쳐 여러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결혼]] 후 가지 못한 [[신혼여행]]을 가고자 했으나 그 대신 [[여객선]] 1등석 표를 사서 [[이태리]]에 있는 모친을 모셔왔다. 폰지의 모친은 폰지 부부와 같이 살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1920년]] [[7월 31일]], 폰지는 [[신부]] [[파스칼레 디 밀라]]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모친을 기리는 의미로 10만 불을 기부했다. [[마카로니]] [[회사]]를회사를 사들였으며 [[와인]] [[회사]] 일부를 사들여 투자자들에게 줄 배당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 사기 행각 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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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 행각 몰락 ===
[[보스턴 포스트]]에 의해 사기 행각이 폭로됐고 그 와중에 폰지는 [[매사추세츠 주]]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사기 행각이 드러나게 됐다. 이로 인해 [[보스턴 포스트]]는포스트는 [[1921년]] 공공 서비스 부문 [[퓰리처 상]]을 수상하게 된다.
 
=== 피해 규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