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바르디아 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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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 동맹은 여러 차례 재조직됐고 1197년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 6세]]의 죽음으로 위신을 얻은 한편, [[로마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의 막내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그의 경쟁 상대인 [[벨프 가문]]의 [[오토 4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두고 싸워야만 했다. 1218년부터 단독 로마왕, 1220년부터 단독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2세는 1226년 [[제6차 십자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이탈리아내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공작]]들을 소집했다.
 
이탈리아 내에서 힘을 얻고자 하던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의 노력은 롬바르디아 동맹이 소속된 도시들에 의해 실패했고 그들을 [[제국 추방령]]에 놓았다. 비아첸차 점령과 1237년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승리를 포함한 그의 조치들은 황제가 능수능란한 전략가라는 평판을 얻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밀라노의 모든 평화 제의를 거절과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하며 자신의 힘을 잘못 판단했다. 프리드리히의 증오심에 물든 이 결정과 모든 평화적 협상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던 이는 중대한 역사의 순간이였다. 밀라노와 다른 도시들은 그의 공격에 함께 맞섰고, 1238년 10월 그는 브레시아 공성전을 실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