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범 (189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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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외동아들 김협(金浹, 1917년 12월 21일 ~ 1994년 6월 16일)
| 부모 = 김순욱(생부) <br/> 선우 순(모) <br/> 김기섭(의붓아버지)
| 친척 = 김길란(친누나) <br/> [[김학규 (1900년)|김학규]](이부 남동생)
| 복무 기간 = 1920년 2월 23일 ~ 1926년 8월 25일
| 최종 계급 = [[대한독립군]] [[중사 (군사)|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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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시절 ===
1919년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이후 1920년 2월, 천마별영(天摩別營)에서 활동하였다. 7개월 후 1920년 9월 무렵, 관전현(寬甸縣) 안자구(安子溝)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상하이 주재 대한 임정에 파견되었던 이탁(李鐸)이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예하 간부들과 협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독립군영으로서독립군영 부대로도 보다 더더욱이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전투군단을 육성할 목적 관련 하에 대한청년단연합회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및 한족회(韓族會)를 통합하여 편성한 것이다. 대한광복군총영 수석참모총사령관(大韓光復軍總營 首席參謀總司令官)에는 대한독립단 출신의 조맹선(趙孟善)을 선임하고, 참모장(參謀長)에 이탁, 경리부 부장(經理部 部長)에 조병준(趙秉準), 본영 총대장(本營 總隊長)에 오동진(吳東振)이 취임하고, 모든 영원(營員)을 비롯한 부대원(部隊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군인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대한독립단 산하 광복군 총영의 조직은 총사령부의 본부인 총영 이외에도 국내외 각 도와 군에 도영(道營)·군영(郡營), 혹은 별영(別營)을 두도록 하였는데 별영은 천마별영과 벽파별영(碧波別營)이 대표적인 조직이었는데 본래 천마별영에 2년간을 복무하던 김성범은 1922년 벽파별영(碧波別營)에 옮겨 활동하다가 1년 후 1923년 천마별영에 재복귀 가입을 하여 복무 활동하였다.
 
그가 주로 복무한 천마별영은 원래 최시흥(崔時興)에 의하여 1920년 2월 구한국군인 출신들을 주축으로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령삭면(古寧朔面) 천마산에서 조직되었고 김성범 그도 천마별영에서 원년 구성원으로 복무 활동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사령장 최시흥, 부관 최지풍(崔志豊), 참모 박응백(朴應伯)·박영찬(朴泳燦)·최윤희(崔允熙), 경리 김세진(金世鎭), 중대장 최의집(崔義楫), 소대장 김상옥(金尙玉)·김용택(金龍澤) 등이었다. 활동 관련 근거지는 평안북도 삭주(朔州)·의주·구성(龜城)·창성(昌城) 등지였으며, 주로 금광 채굴 관련 광산 구역 등지를 배경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김성범은 천마단 사령부 오장(伍長)으로서 결사대를 이끌고 무려 46회나 국경을 넘나들며, 초산·창성(昌城)·벽동(碧潼)·강계(江界)·희천(熙川)·태천(泰川)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면사무소 습격 등의 활동을 20여 회나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