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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푸라레스로 간주되는 최초의 정치인은 [[그라쿠스 형제]]이다. 그들은 시민 집회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여 [[호민관]]에 취임하여 개혁을 시도했다. 귀족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평민에게 농지를 분배하려고 했지만, 원로원의 저항을 부딪쳐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이때부터 포푸라레스와 옵티마테스의 다툼, 나아가 [[내란의 세기]]의 막이 열렸다.
 
포푸라레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집정관]]에 취임할 무렵에 크게 득세했다. (마리우스파)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통해 군을 기존의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 전환전환하고, 빈민 출신의 지원병을 고용하여 그라쿠스 형제와는 다른 형태로 몰락한 평민을 구제하는 동시에 로마의 군사를 구조 조정했다. 하지만 신장한세력을 확장한 포푸라레스는 마리우스의 사후 옵티마테스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독재관]]에 취임하면취임하면서 그들 대부분이 숙청되었다. (마지막 마리우스파,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 3차에 걸친 [[노예전쟁]])
 
[[기원전 78년]]의 술라의 사망 후 포푸라레스를 칭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카이사르의 내전|로마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일단 그라쿠스 형제가 좌절한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고, 포푸라레스는 전성기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