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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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1920년대 이후 [[일본 제국|일본제국]] [[관동군]]은 1928년 [[장작림 폭살 사건]]을 일으키는 등, 일본 본토 내각의 명령도 무시할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터지고, 장작림 폭살 사건 이후 중국에서 일본 상품에 대한 대대적인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등의 문제로 [[일본 제국|일본제국]]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되었다. 관동군은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다.시작했고, 이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 현실화되었고,현실화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수립되자, [[국공 내전|제1차 국공내전]]으로 시끄럽던 중국에서는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었다.
 
한편, [[1919년]] [[3·1 운동|3·1운동]] 이후 민족 개량, 실력 양성, 자치를 내건 일본제국의 [[문화 통치|문화통치]]가 조선 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우익|우파]] 독립운동가들이 차츰 변절하였다. 한편 독자적인 세력과 투쟁력을 확보한 좌파 세력은 우파 세력과의 비합작 및 단독 투쟁 노선을 확인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광주학생운동]]과 [[간도 폭동|간도봉기]]를 일으키는 등 극한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3·1 운동|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강화로 국내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대다수 좌파 무장투쟁가들은 만주로 옮겨갔고, 코민테른 1국1당 원칙에 따라 만주에서 독자적인 정당을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인 좌파 세력은이들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 전선을 구축한다. 이에 일본제국은 중국공산당과 조선인으로 결성된 무장 세력을 분열하려는 공작을 시도하게 된다.
 
== 전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