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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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은 [[일제 강점기|일제강점기]] 1932년부터 1937년까지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에 의해 일어났던 조선인 학살 사건이다. [[일본 제국|일본제국]] [[관동군]]은 동[[만주]]의 조·중 연합 세력에 조선인 [[밀정]]을 잠입하게 하여 항일 [[유격대]]와 [[공산주의]] 세력, [[중국공산당]] 조직과 대중단체 등 조·중 연합을 분열하게 하려고 획책했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인과 같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제국 밀정이라고 의심받아 살해되었다.
 
== 배경 ==
1920년대 이후 [[일본 제국|일본제국]] [[관동군]]은 1928년 [[장작림 폭살 사건]]을 일으키는 등, 일본 본토 내각의 명령도 무시할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터지고, 장작림 폭살 사건 이후 중국에서 일본 상품에 대한 대대적인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등의 문제로 [[일본 제국|일본제국]]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관동군은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고, 이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 현실화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수립되자, 제1차 [[국공 내전|제1차 국공내전]]으로 시끄럽던 중국에서는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었다.
 
한편, [[1919년]] [[3·1 운동|3·1운동]] 이후 민족 개량, 실력 양성, 자치를 내건 일본제국의 [[문화 통치|문화통치]]가 조선 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우익|우파]] 독립운동가들이 차츰 변절하였다. 독자적인 세력과 투쟁력을 확보한 좌파 세력은 우파 세력과의 비합작 및 단독 투쟁 노선을 확인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광주학생운동]]과 [[간도 폭동|간도봉기]]를 일으키는 등 극한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3·1 운동|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강화로 국내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대다수 좌파 무장투쟁가들은 만주로 옮겨갔고, 코민테른 1국1당 원칙에 따라 만주에서 독자적인 정당을 설립할 수 없었던 이들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 전선을 구축한다. 이에 일본제국은 중국공산당과 조선인으로 결성된 무장 세력을 분열하려는 공작을 시도하게 된다.
 
== 전개 ==
 
=== 민생단 결성과 해체 ===
중국 내 조선인과 중국의 항일 세력이 합작하자 그것을 와해하고자 일본제국은 1932년 2월 조선인들로 구성된 민생단(民生團)이라는 비밀 어용 단체를 조직했다. 최남선의 매부 [[박석윤]](朴錫胤)이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파 [[조병상]](曺秉相)과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金東漢)·[[김택현]](金澤鉉)·[[이경재]](李庚在)·[[이인선]](李仁善)·[[최윤주]](崔允周) 등 친일 조선인들과 협의하여 만주 사변 직후부터 조직을 준비하하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와 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는 이들을 후원하여 1932년 2월 5일 일본제국 육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營)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용정에서 발족하였다. 재만 조선인의 생활 안정과 낙토 건설을 표방하였으나, 기실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고 [[중국공산당]] 조직과 그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려는 친일반공 밀정 조직이었다. 중국공산당 조직이 강력하여 별 성과를 내지 못하자 1932년 7월에 일시로 사무소를 폐쇄하였으나, [[일본 제국|일본제국]] 헌병대에서 다시 살려내어 계속 후원하였다.
 
=== 송노톨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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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남 사건 이후 민생단에 큰 적대감을 품은 조·중 연합 전선은 민생단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민생단원이고 누가 아닌지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에 있었다. 동만특위는 체포해야 하는 민생단원의 할당량을 정하기에 이르렀고, 반민생단 투쟁은 비이성적으로 폭주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인용문|처음에는 그럴듯한 정치적 이유로 숙청이 시작되었지만, 일단 숙청이 가속화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밥을 흘려도 민생단(어렵게 구한 식량을 허비하니까), 밥을 설구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민생단(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은 전투력을 약화시키니까), 배탈이 나거나 두통을 호소해도 민생단,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쉬어도 민생단(혁명의 장래에 불안감을 조장하니까), 설사를 해도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고 말해도 민생단(민족주의와 향수를 조장하니까), 일이 어렵다고 불평해도 민생단,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민생단(정체를 감추려고 일을 열심히 한 것이니까), 일제의 감옥에서 처형되지 않고 살아돌아와도 민생단, 오발을 해도 민생단, 가족 중에 민생단 혐의자가 나와도 민생단, 민생단 혐의자와 사랑에 빠져도 민생단,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민생단으로 몰리는 등 무고한 사람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모는 꼬투리는 끝이 없었다.<ref>{{뉴스 인용|url=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15.html|제목=[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밥을 흘려도 죽였다|저자=한홍구|이름=한겨레21|날짜=2002. -03.-06|뉴스=|출판사=|확인날짜=2018년 4월 23일 00:28}}</ref>}}
 
동만주특별위원회와 현위의 간부 [[이상묵|리상묵]](李相默)은 조선인 유격대원 중 70% 이상이 민생단원이라고 주장하며 60여 명의 조선인을 처형하였으나, 본인도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훈춘현 공산주의청년단 서기로 일하던 정필국(鄭弼局)은 어려서 가족을 모두 일제에 잃어 반민생단 투쟁에 앞장서다 점차 회의감을 품고 소극적으로 변했는데,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민생단원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정필국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보초들에게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후환을 걱정한 보초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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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생단원으로 지목된 [[김일성]] ===
한편,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 또한 반민생단 투쟁 당시 민생단원으로 지목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이었던 김일성은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 속에서 민생단원의 의심을 받으며 평대원으로 강등되었고, 1933년 9월 동녕현 전투에 참가하며 민생단원 혐의를 벗겠다며 앞장서서 돌격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joosungha/seoullife-04072017103301.html|제목=김일성 1차 북만원정의 진실|저자=주성하|이름=RFA|날짜=2017.-04.-07|뉴스=|출판사=|확인날짜=2018.-04.-23. 00:21}}</ref> 이 때 김일성을 구제해준 것이 동만특위 위원이었던 중국인 왕윤성인데, 그는 김일성이 체포되려는 때 그를 빼돌려 북만주의 동북항일연군 제5군장(軍長) 저우바오중(周保中) 부대로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09/0200000000AKR20170109144900014.HTML|제목=[단독]'김일성 평전' 저자 유순호 "김일성 회고록 왜곡 많아"|저자=곽명일|이름=연합뉴스|날짜=2017.-01.-10|뉴스=|출판사=|확인날짜=2018년 4월 23일 01:19}}</ref> 오늘날 북한에서는 이를 저우바오중을 돕기 위한 북만원정이라며 홍보하고 있다. 동녕현 전투 또한 김일성의 지휘로 한 사건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북만주로 도망친 김일성은 민생단사건이 일단락된 후 동만주로 돌아와 민생단 혐의 때문에 쫓겨난 조선인들로 유격대를 재조직했고, 이들은 북한의 이른바 혁명세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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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생단 사건을 다룬 작품 ==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문학과 지성사, 2008.10.01. ISBN 978-89-320-1900-0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만보산 사건]]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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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위치=서울
|id=ISBN 89-7199-036-8
|쪽=107~115쪽115
|장=만주의 친일단체와 인맥
|인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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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각주}}
 
[[분류:일제 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