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포 대기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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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주요 원인은 덴포 4년([[1833년]])에 내린 호우에 의한 [[홍수]]와 [[냉해]]로 인한 대흉작이었다. [[도호쿠 지방]]([[무쓰 국]]과 [[데와 국]])의 피해가 가장 컸고, 특히 [[센다이 번]]의 경우에는 한창 신전(新田) 개발을 실시하여, 실제 수확량으로는 100만석 이상의 녹봉을 가지고 있었지만, 벼농사에 편중된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심했다. 50년 이전의 [[덴메이 대기근]]과 비교하여 흉작 대책이 수립해 두었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적었다. 상품 작물의 상업화로 농촌빈부 격차가 커졌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이 많이 굶주려야 했다. 각지에서 많은 수의 아사자가 생겼고, [[도쿠가와 막부]]는 구제를 위해, [[에도]]에서 시중 21 곳에 구제처(5800명 수용)를 설치했지만 구제 대상이 70만 명을 넘어 섰다. 쌀값이 급등하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발했다. 덴포 7년 6월에는 [[천령|막부직할령]]인 [[가이 국]] 한 나라 규모의 백성이 봉기한 덴포 소동과 덴포 8년 2월에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특히 오사카에서는 매일 약 150명 ~ 200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피해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 번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다하라 번]]에서 [[가로 (관직)|가로]]였던 [[와타나베 카잔]]이 스승이었던 [[사토 노부히로]]의 사상을 바탕으로 흉황심득서(凶荒心得書)를 저술하여 영주에 제출하였고, 관리의 기강 단속과 절약, 민중구제를 가장 우선해야 할 것으로 설득하여 급여 개혁과 의창의 정비를 수행하여 성과를 올렸다. 또한 [[요네자와 번]]도 [[덴메이 대기근]]의 교훈을 살려 의창을 정비하고, 구황식 안내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의 사전 조치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추정 인구는 1833년부터 5년간 125만 2000명 감소하였고, 인구 감소폭 규모로는 [[덴메이 대기근]]에 필적했다.
 
==참고 자료==
 
당시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전기까지의 연령별 인구와 출산율, 사망률 추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ref>[http://ir.lib.shimane-u.ac.jp/files/public/3/38670/20170425034818568179/25285151_79-96.pdf 「江戸後期から明治前期までの年齢別人口および出生率・死亡率の推計」高橋 眞一 - 新潟産業大学] p.88</ref>
 
* 1833년 (덴포 4) 3,198만
* 1838년 (덴포 9) 3,073만
* 1843년 (덴포 14) 3,177만
 
==각주==
{{각주}}
 
{{토막글|일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