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에이 대기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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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19년 말부터 이듬해 20년(1643년)에 걸쳐 아사자가 증가하고, 에도를 시작으로 삼도의 인구 유동이 발생했다. 막부나 여러 번은 굶주리는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각 번의 대관에게 인도했다. 또한 쌀 부족과 쌀값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다이묘의 품삯 쌀을 에도로 돌려보냈다. 3월에는 논밭의 영구 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대기근의 배경에는 1630년대부터 1640년대의 동아시아 규모의 기상 이변 외에도 [[에도 시대]] 초기의 무사 계급의 빈곤, [[참근교대]], 대규모 토목공사, 장군의 상경과 일광사참(日光社参) 등과 같이, 무단 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막부와 번의 많은 지출, 연공미를 교환할 시장의 미비 등 다양한 요인을 들 수 있다.
 
막부는 사무라이의 몰락을 교만과 사치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무가제법도]]’ 등으로 절약을 지시했다. 예를 들어, 1635년의 무가제법도 개정으로 막부는 참근교대를 1년 교대로 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참근교대에 다른 비용을 지우지 않도록 호소하고 있었다. 무사의 곤궁은 백성에 대한 새로운 수탈을 불렀고, 이것이 대기근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한다.
 
[[시마바라의 난]]에서 간에이 대기근, [[낭인 (일본사)|낭인]]의 불만을 배경으로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대체하기 위해 일어난 막부 토벌 계획이었던 [[게이안의 변]](慶安の変) 등을 계기로 막부는 무단 정치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막부 정치는 백성무육(百姓撫育, 백성 성립이라고도 한다. 즉 백성이 전란과 기근에서 해방되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상황 설정)을 추진하였고, 여러 다이묘에게 부과했던 대규모 공사는 격감시켰고, 참근교대로 대체되었다. 또한 제번도 늦게나마 번정 개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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