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남북정상회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내용추가
태그: m 모바일 웹
→‎개요: 오타고침
태그: m 모바일 웹
15번째 줄:
 
== 개요 ==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됐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 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와 생애 전반에 대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개최 발표 전에 현대그룹에서 북한에 4억 5천만 달러를 송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2003년 대북송금특검이 도입돼 수사를 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20672 <대북송금특검 및 정몽헌회장자살사건>]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위원회, 2005년 09월 10일 출간, 2012년 05월 24일 확인</ref>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에 의한 특검팀 수사결과 "현대그룹이 북한에 송금한 돈의 액수는 총 5억 달러이며 이 중 5000만 달러는 현물로 보내졌다"고 발표하고 "5억 달러 중에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김대중 정부가 북측에 건네기로 약속한 정책 자금 1억 달러가 포함돼 있다"라고 밝혔다.
 
현대 상선이 조달한 2억 달러는 2000년 6월 9일 북한의 대성은행의 계좌 (중국 마카오 지점) 으로 송금되었으며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조달한 2억 5000 만 달러는 홍콩과 싱가포르의 김정일 비밀계좌로 송금되었다고 진술된 기록이 공개되었다.
 
김정일은 정권유지에 대한 압박감에 [[미국]]을 의식했고, 미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미국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의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했다고 말했다.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전해준 서한을 받고 [[빌 클린턴]]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고 하며, 올브라이트가 방북할 때 아리랑 공연 등의 잔치를 벌였다.<ref>[[프랑스]] 방송 제작 <긴급입수 김정일, 금지된 과거> [[KBS]] 2011년 3월 4일 방송</ref>
==의장대 사열==
남북은 사전 협의에서 1994년 정상회담 실무접촉 합의사항대로 이행하자고 하여, 21발의 예포를 쏘고, 국가를 연주하고, [[의장대]]를 사열하는 등의 환영행사를 생략하기로 했다.<ref>[남북정상회담] 의전·경호 '형식'피하고 '실무형'으로, 국민일보, 2000-05-16</ref>